<뉴욕 정신과 의사의 사람 도서관>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나종호 미국 예일대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는 ‘자살은 극단적 선택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자살과 동의어처럼 광범위하게 사용해온 ‘극단적 선택’에 그가 의문을 제기한 이유는 자살 순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자살을 감소시킨다는 근거가 부족해서다. 또 실제 자살생존자들을 만나 당시 어떤 생각을 했냐고 질문하면 대부분 자살 생각에 강하게 사로잡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자살을 이기적인 선택으로 규정하는 극단적 선택이란 표현은 적절한 치료와 도움을 받을 기회를 박탈하고 유가족에게도 선택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만 가중할 수 있다고 호소했다.
필자는 중앙심리부검센터장으로 일하면서 자살유가족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용기를 내 면담에 임해준 그들에게 사망 전 행동 변화가 우울증과 같은 정신과 질환의 결과였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고인의 90%는 사망 당시에 정신과 질환을 진단할 수 있는 신호를 보냈다. 고인이 된 많은 사람은 이미 아팠던 것이었다. 선택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도움을 청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가 한국 언론에서 널리 쓰인 건 자살을 기사 제목으로 쓰지 말자는 자살보도 권고기준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사실 자살보도 권고기준 어디에도 극단적 선택이란 단어는 없다. 몇 년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유명연예인 자살보도가 있었다. 당시 해외 언론은 당일 기사에서 예외 없이 ‘사망한 채 발견됐다’고 타이틀을 뽑고 이후 분석 기사에서는 ‘자살로 사망했다’고 기술했다.
진료 과정에서 유명인 자살 소식을 환자들을 통해 듣는 경우가 많다. 자살보도 영향으로 관련 소식이 환자들에게 곧바로 퍼지기 때문이다. 이런 보도는 환자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런 사람도 사망했는데 저 같은 사람은 살아서 뭐하나요? 자살로 떠난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가요. 남 일 같지 않아요. 과연 희망이 있을까요?” 유명인 자살 보도에 대해 국민 대부분은 안타까움을 느끼겠지만, 그로 인한 삶의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다. 그러나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는 다른 이야기다.
자살보도가 자살수단 등 관련 정보를 많이 이야기할수록 많은 사람들은 베르테르효과로 자신의 처지와 동일시한다. 2007년 10월2일 고 최진실 배우가 사망한 그달의 자살사망자가 1000여명 증가했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이야기이다. 실제 필자도 그때 처음 외래환자를 자살로 잃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였고 부인이었고 많은 사람을 돕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당시 보도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망했고 이후에 이어진 가족 면담은 눈물바다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써야 할까? 기본적으로 자살 사건을 보도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렇게 하는 나라들도 있다. 그러나 언론 현실에선 고민이 많을 것이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측면 그리고 알아야 할 정보라는 측면도 있을 것이다. 사건기사가 아니라 시간이 지난 후 자살 감소를 위한 분석과 대안을 이야기하는 기사는 긍정적인 효과도 분명 있다.
그러면 사고 직후 ‘숨진 채 발견’이라고 쓴다면 좀 지나서 ‘자살’로 써도 될까? 이런 현실적인 고민을 질문하는 기자분들을 만나게 된다.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이렇게까지 정의한 가이드라인(자살보도 권고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답을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수단을 보도하지 않고 자살위기에 빠진 사람에게 핫라인을 알리면서, 자살을 원인으로 추정하거나 단정하지 않고 희망을 찾고 대안을 포함하려는 노력이 기사에 담긴다면, 기자의 진심은 독자에게 그리고 위기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전달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국민의 알 권리와 생명을 동시에 지키려 고민하고 애쓰는 언론인들이 많다. 그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다만 고민하고 또 고쳐 쓰는 언론인의 마음을 담기에 ‘극단적 선택’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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