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가 특별히 대단해서가 아니라 권력에 순치되지 않고 꿋꿋이 역할을 한 점을 격려하기 위해 준 상이라고 생각한다.”
2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제54회 한국기자상 시상식에선 다양한 형태의 권력, 사회적 약자에 대해 보도하고 데이터 기반 탐사보도, 참여관찰 등 혁신적인 저널리즘을 구현한 기자들이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기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역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지금 이 시간에도 기사를 발굴하고 열심히 맨땅에 헤딩하는 용감한 대한민국의 기자들을 응원한다” 말했다.
또 한국기자상을 받기까지 응원하고 격려해준 가족과 동료들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렸다. 아래는 수상소감 전문이다.
<1호기 속 수상한 민간인..尹 대통령 사적수행·사적채용 논란> MBC 이기주 기자
대통령실을 출입하고 있는 MBC의 이기주 기자다. 이정은 반장과 신수아 기자 함께 고생했는데 같이 받아서 너무 기쁘다. 작년 5월에 대통령실에 취업하지 못한 어떤 분이 삼각지역의 한 카페에서 개인적인 푸념처럼 늘어놓던 많은 말들을 흘려듣지 않은 제 자신을 일단 먼저 칭찬하고 싶습니다.
그때는 그 기사가 몇 달 뒤 이렇게 크게 될지도 몰랐고 큰 상을 받게 될지도 몰랐다. 저희 보도가 특별히 대단해서 대상을 받았다기보다는 저희가 그동안 겪었던 많은 일들 속에서 권력에 순치되지 않고 꿋꿋이 역할을 한 점을 격려해 주시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더욱 열심히 하겠다. 작년 8월 이 보도로 저희가 이달의기자상을 받았다.
그때 많은 선배분들이 “청와대 출입기자, 대통령실 기자가 이달의기자상을 받은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만큼 대통령 측 내부를 취재한 기사가 그만큼 없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저희가 보도한 이후는 더욱 더 없어진 것 같다. 더 폐쇄적인 구조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기껏 나오는 대통령실 발 단독 기사는 ‘대통령이 사석에서 격노를 했다’라든지 ‘비공식 자리에서 당에 대해서 어떤 말을 했다’라든지 이런 대통령의 의중을 담는 기사들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요즘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마치 검찰 기자가 검찰의 내부 문제는 취재하지 않고 수사 정보나 피의사실을 단독 보도하는 그런 경향이 대통령실에도 젖어드는 게 아닌가는 우려가 개인적으로 든다.
외람되지만 권력자들의 의중을 여쭙고 받아쓰는 그런 기사들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도 취재해 기사를 발굴하고 열심히 맨땅에 헤딩하는 용감한 대한민국의 취재 기자들을 응원하겠다. 저도 열심히 하겠다. 고맙다.
<쌍방울·이화영·아태협 ‘대북 커넥션’ 의혹> CBS 윤준호 기자
먼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이렇게 값진 상을 주신 협회 측에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CBS가 쌍방울의 변호사비 대납 의혹을 처음 제기한 때는 2021년 10월이었다. 계속 취재를 이어오다가 작년 8월 쌍방울의 대북 커넥션 의혹을 포착해서 처음 보도했다.
취재가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유력 정치인이 연루된 터라 더욱 그랬다. 결코 짧지 않은 1년 2개월의 시간 동안 취재를 한다는 게 또 심리적으로 큰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서로 다독이고 응원하고 이끌어준 CBS의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오늘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쌍방울의 변호사비 대납 의혹과 대북 커넥션 의혹을 제기한 CBS 보도는 긴 시간 추적 끝에 사안의 실체를 밝히고 언론 보도가 수사를 추적하는 통상의 법조 기사와 달리 보도를 통해 수사를 견인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자부한다.
취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달려온 시간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안의 실체를 추적하는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겠다. 그리고 취재와 보도에 있어서 항상 물심양면 지원해 주신 정신적 지주 이재기 보도국장을 비롯해 이재준 사회부장 그리고 최철 전 사회부장 그리고 사랑하는 우리 김중호 법조팀장, 모든 CBS 동료들에게 이 영광의 기쁨을 돌린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했냐> 경향신문 조형국 기자
한국기자상이라는 영예로운 상을 받게 된 것 매우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 저희가 하려고 했던 바를 구구절절 설명 드리지 않더라도 또 저희 기사에서 애써 큰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더라도 실은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께서 다들 알고 계셨던 게 아닌가 싶다.
'명함이 없다. 일은 쉬지 않았다.' 크게는 사회가, 좁게는 가족이 허락하지 않아서 충분한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했고 또 사회에 가족의 욕구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일을 해야 했다는 것. 또 결혼을 하면 일을 관뒀고 아이가 크면 다시 일을 시작했다는 몇몇 개의 문장들로 누군가의 삶을 설명한다는 게 굉장히 성급하고 투박하겠지만, 거꾸로 이 몇 문장만으로 내 주변에 많은 누군가들의 삶이 설명된다고, 떠오른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명함을 찾아드리고 싶다'라고 했던 저희의 욕심은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이름과 전화번호 그리고 소속과 이메일이 적혀 있는 이 명함은 그 사람의 어떤 것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지만 이 손바닥만 한 작은 종이가 사회가 노동을 인정하는 방식을 어느 정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마치 이 명함이 없다는 이유로, 명함을 주고받는 종류의 노동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고령층 여성들의 노동이 그 가치를 충분히 존중받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노동 덕분에 여러 사람들의 생이나 가정이나 회사, 크게는 우리 사회가 지탱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 드러내고 규정하고 강조하지 않아서 마치 없던 일처럼 다뤄져 왔던 것 같다. 그런 현실을 인정받지 못하는 억울함 대신에 저희는 좀 노동하는 사람으로서의 자부심과 당당함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 초점 그리고 그런 시각들 덕분에 어쩌면 어머니들의 삶을 좀 더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또 많은 분들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로 다가갔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헌신으로 포장돼 있는 희생이나 그 시절에 태어나서 자란 여성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모든 종류의 차별이나 불평등 같은 게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들께서는 저희에게 '살아보니 인생이 그렇게 길지 않더라. 재밌게 살아라'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그 말씀대로 저희 후배 세대들은 좀 더 아프지 않게 재미있게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면서 즐겁게 살 수 있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부분이 굉장히 많았음에도 좋은 점을 봐주신 협회 측에 감사드린다. 경향신문의 다른 동료들이 현장을 챙기고 매일매일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런 기획에 저희가 힘을 쓸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께 감사함을 돌리고 싶다.
<살아남은 김용균들> 한겨레신문 장필수 기자
언론과 정부는 노동자가 죽어야만 움직이기 시작한다. 기자들의 취재도 그때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유족들이 거리로 나서야만 경찰 조사가 시작되고 고용노동부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살아남은 김용균들’은 그런 언론 보도에 관행의 문제를 한번 담아보자는 생각으로 기획된 보도였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는 산재 노동자들을 한번 찾으러 떠나보자는 기획으로 시작됐다. 산재는 모두가 숨기고 싶어합니다. 저희가 접촉했던 수십 곳의 기업들이 모두 산재를 숨기려고 했다. 그래서 결국에는 직접 발로 뛰어서 취재원들이 조각조각 알려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다치신 분들을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 회사 자체가 노동과 인권에 천착해온 선배 분들이 많으셔서 한겨레 기자라고 할 때 호의적으로 대응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당초에 전문가분들의 의견을 많이 들으려고 노력을 했는데 노무사분들도, 활동가분들도 저희가 취재하려는 분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초기에 취재하는 데 있어서 고생을 많이 했다. 취재를 하면 할수록 '이게 과연 될까'라는 생각에 더 나아가서 '이건 반드시 써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많이 바뀌게 됐던 것 같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좋은 보도가 나온 것 같고 저희의 이런 성과가 기자협회에서 인정을 받게 돼서 더욱 뜻 깊은 것 같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희는 탐사팀이기 때문에 편집국에 어떻게 보면 많은 시간과 지원을 받고 있는 팀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많은 팀원들의 희생을 먹고 운영되는 팀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모든 구성원들을 대표해서 받았다는 생각을 한다. 저희의 보도를 기점으로 조금 더 살아남은 김용균들에 대해서 주목하는 회사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고맙다.
<지역소멸 극복 프로젝트 ‘경남신문 심부름센터’> 경남신문 도영진 기자
수상자분들께서 트로피를 들고 계시길래 얼마나 무거운지 예상하기 힘들었는데 되게 무겁다. 앞으로도 이 트로피의 무게를 잘 알고 또 앞으로 연차가 쌓일수록 더 성실하고 취재원분들의 목소리를 더 가까이서 듣는 기자가 되겠다. 처음 이 기획안을 회사 편집국에 보고했을 때 “기자상 감이다”라고 들었는데 처음에는 ‘사내 기자상 감’으로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 한국기자상을 받을 수 있게 되어서 큰 영광이다. 다른 수상자분들에 비해서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더 열심히 하라는 취지로 생각하고 앞으로 더 겸손한 기자가 되겠다. 감사하다.
<산복빨래방-세탁비 대신 이야기를 받습니다> 부산일보 김준용 기자
지난 6개월 동안 산복빨래방 사장으로 일했다. ‘산복빨래방’은 부산 산복도로에 있는 1950~1960년대 우리 사회를 이끌었고, 우리나라를 이끌었던 어머님 아버님들의 이야기를 듣는 빨래방 이야기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저희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오고 지금도 열심히 살아오고 계신 어머님 아버님들이 주인공이다.
산복빨래방 기획을 하면서 회사에서 3개월의 시간 동안 저희를 기다려주셨다. 기다리는 동안 매번 엘리베이터에서 선배들이 “너희 뭐 하노”라고 물어보셨다. “사실 저희도 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답을 했다. 다행히 무언가를 해서 여기에 서게 돼서 선배님들께도 감사하고 저희가 산복빨래방을 하는 동안 신문 지면을 채우고 현장에서 '저 선배들은 뭐 하냐'고 생각하면서 일했던 후배들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리고 저희는 기자라서 한국기자상 시상식에 이름도 올리고 할 수 있었는데 사실 저희 콘텐츠를 만드는 데는 두 분의 PD님들도 함께해 주셨다. PD님들께서 잘 찍어주시고 저희를 예쁘게, 어머님 아버님들을 의미 있게 담아주셔서 산복빨래방이 세상에 알려진 것 같다.
저는 9년 차 기자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9년 차가 되니까 ‘내가 기자를 하는 게 맞나. 기자를 하는 게 정말 어렵다. 가끔은 재미없다’는 생각도 했다. 운 좋게 산복빨래방을 만나고 어머니와 아버님들과 9년 차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낸 것 같다. 앞으로도 이 기억을 가지고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고 제 자신도 좀 더 기자로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겠다. 감사하다.
<부산 부랑인 집단수용시설 인권 유린의 기원 ‘영화숙·재생원’ 피해 실태 추적> 국제신문 신심범 기자
서울 올라오기 전에도 우리 영화숙·재생원 피해자분들과 전화를 한 통 하고 왔다. “상 받는 만큼 결말을 잘 지어달라”고 어르신들께서 당부를 해 주셨다. 이 기사가 우리가 하는 말로 ‘오사마리’를 못 찍은 기사이기 때문에 상을 받으면서 마음이 좀 무겁다.
영화숙·재생원이라는 시설은 60년대 부산 서구 장림동에 있었던 부랑아, 부랑인 수용시설이었다. 부랑인, 부랑아라고 이름은 붙었지만 고아거나 가난해서가 아니고 그저 행색이 남루하면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던 시설이었다. 우리가 흔히 부랑인 수용 시설 하면 떠올리는 군대식 통제, 원생을 폭력으로서 통제하는 수단을 사용해 시설을 관리한 부산에서는 첫 사례로 저희가 확인을 했다.
사실 영화숙·재생원이라는 시설을 처음 알게 된 건 5년 전이었다. 제가 이제 경찰 기자를 막 시작해서 열심히 경찰서를 출입하고 있는데 원체 기사 쓸 걸 찾지 못해서 매일 밤마다 집에 가서 도대체 내일 뭘 써야 되느냐 가족들한테 하소연을 자주 했다. 마침 저희 어머니가 서구에서 어릴 적 오래 사셨다. 어머니가 아들 보기가 안쓰러웠는지 “내 어릴 때 영화소라는 데가 있었는데 멀쩡한 애들 끌고 가서 막 패는 것 같더라. 걔네들 맨날 머리 박박 밀고 제복 입고 제대로 애들을 키워주지 않는 것 같더라. 한번 알아봐라”라며 5년 전 이제 갓 수습도 안 뗀 저한테 제보를 해주셨는데 제가 단칼에 거절을 했다. “엄마 50년 전 말만 가지고 종이도 한 장 없는데”라고 한 기억이 있다.
5년이 지나 같이 취재하신 우리 김성룡 선배가 실제 영화숙 재생원 피해자분과 만나게 되시고 저와도 만나게 됐다. 그분 말씀하시는 게 거의 저희 어머니가 제게 말한 것과 거의 유사했다. “억지로 끌려가서 많이 맞았고 먹을 거라고는 보리죽, 옥수수죽밖에 없었고, 억지로 갇혀 있었고, 그걸 입증할 수 있는 사진이나 서류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때는 거절을 못했다. 그분이 저보다 연세가 40살이 더 많으셨다. 어떻게 보면 거의 큰 손자뻘인 기자 손을 잡고 “기자님 세상에 억울하게 끌려가서 맞는 사람은 선감학원과 형제복지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저희들이 더 먼저 그런 일을 당했고 누구보다도 국가 폭력에 시달려왔는데 어떻게 신문에 영화숙·재생원 시설 언급이 단 한 번도 되지 않고 그런 시설이 있었다는 걸 부산 사람들조차 모를 수가 있느냐. 우리가 당했던 일을 당했다고 인정받게 해 주십시오”라며 우셨다.
‘어쩔 수 없다. 좀 찾아봐야겠다’ 싶어서 우여곡절을 겪었다. 국가기록원에도 가고 부산시 서고도 들어가 보려고 노력을 하고 이런저런 또 관련해서 박사 논문 쓰신 분들 찾아뵙고 해서 억지로 문헌을 끌어모아 첫 기사를 냈다. 신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게 그다음 날 바로 또 다른 피해자분이 전화를 주셨다. “나도 여기에 있었다. 나 기사에 나온 사람한테 진짜 밥 한 끼 사주고 싶다. 연락처를 달라”며 제보했다. 저는 좀 의심이 많은 편이라 “진짜 계셨어요. 저랑 같이 한번 시설이 어디인지 한번 가보시죠”라고 했다. 그분이 원래 화물차 기사를 하시다가 사고를 당해서 휠체어를 타시는데 휠체어를 타고, 타고 장림동 산비탈을 올라가시면서 “여기에 내가 사람을 묻었고 여기에서 내가 잔반통을 뒤졌고 여기에서 내가 나무에 묶여서 얻어맞았고 여기에서 내가 도망치다가 발바닥을 20대를 얻어맞았다”며 울면서 증언을 하시더라.
그 이후로 희한하게 피해자분들께서 회사와 저에게 제보해 주셔서 계속해서 사례를 모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서고를 뒤지고 자료를 찾다 보니까 우연치 않게 그 50년 전 기록이 나왔고, 그런 우연과 행운들이 많이 겹쳐서 이런 결과가 좀 나왔던 것 같다. 상을 받긴 받았는데 또 내려가는 길에 어르신들한테 전화 드려서 보고를 해야 한다. 어르신들께 또 뭐라고 제가 감사의 말을 드려야 될지 아니면 제가 책임지겠다고 약속을 드려야 될지 마음이 복잡하다. 저와 우리 다른 선배님과 후배님들께서 도와주셔서 이 상을 받은 만큼 앞으로도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우리 부산의 영화숙·재생원 피해자 분들, 어르신들께서 한을 풀 수 있도록 계속해서 기사로서 역할을 해보도록 하겠다. 감사합니다.
〈ASF 울타리 복마전: 2천억은 어디로 갔나〉 G1방송 원석진 기자
이렇게 부족한 작품임에도 이렇게 큰 상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제가 1년 반 동안 천착해 온 현안이 하나 있다. 약 3년간 1770억 원을 쏟아 붓고도 아프리카 돼지열병 ASF의 남하를 막지 못한 사업, 바로 환경부의 ASF 울타리 사업이다.
저는 애당초 현실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 사업이 중간에 멈추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의문이 생겨 취재를 시작했다. 전국 곳곳을 많이 다녔다. 인상 깊었던 건 제가 환경부 관계자들을 만나서 이 울타리를 “왜 설치했느냐”라고 물어보면 항상 나온 답변은 하나였다. “뭐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정부가 최선을 다 했다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2000억 원을 탕진해서는 안 되고, 그 돈은 사회 안전망을 더 두텁게 하는 데 쓰여야 하기 때문에 이 엉터리로 추진된 사업의 베일을 한 꺼풀씩 벗기면서 다큐를 완성했다.
기획 보도 이후에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 ASF 울타리 문제가 거론이 됐다. 환경부에서도 3년 만에 첫 실태 조사에 착수했다. 저희 지역 언론 같은 경우에는 제작 환경이 많이 열악하다. 그럼에도 이종욱 국장님을 비롯해 보도국에서 취재 환경을 보장해 줬기 때문에 그래도 이런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제가 강원도 인제 출신이다. 그래도 저 오늘 상탄다고 멀리서 친지분이랑 이웃분들께서 축하해 주시기 위해 왔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마흔 둘 나이에 혼자서 삼남매를 키우신 저희 아버지께 한국기자상의 영광을 모두 돌려드리고 싶다.
<우주 독립의 날> 서울경제 오승현 기자
지난 여름, 극도의 긴장감과 그 감동은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저는 지난 6월 대한민국의 우주 강국이 되는 그 순간을 사진으로 기록했다. 사진 한 컷에는 아주 큰 매력이 있다. 살면서 결혼, 입학. 졸업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사진은 빠지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도 저는 찍히고 있다. 사진은 기억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 현대사에서 사진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아주 큰 증거로서의 역할이 됐다. 그리고 이 사회가 변해가는 모습 또한 기록했다. 저는 우리 선배 사진기자들이 해왔던 그런 기록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다.
다만 역사의 순간에 감동을 좀 더 2차원 공간에 생생하고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제게 주어진 기회는 단 한 번 딱 3초가 채 되지 않는 아주 찰나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선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고 그리고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지난 우리 나로호 1차 발사 때 국내 사진은 물론 외신, 심지어 조선중앙통신의 발사체 사진까지 데이터베이스를 한 데 모아서 메타 데이터를 분석하고 깊이 살펴보았다. 그리고 니콘의 기술 자문을 구해서 발사대 인근에 원격 카메라와 타임스 카메라를 설치했고 총 7대의 카메라가 누리호를 향했다.
쉽지 않았다. 그런데 누리호의 성공이 있었기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 같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좀 더 사회에 보탬이 되는 현장의 사진 기자가 되도록 하겠다. 끝으로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김동훈 회장님과 협회 집행부 여러분의 노고와 우리 손동영 대표 그리고 막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게 도와준 김동원 사진부장 그리고 한국사진기자협회 회장이기도 한 저희 이호재 차장 지금도 현장을 지키고 있는 권욱 차장 그리고 성현주 선배까지 저희 사진부 식구들에게 이 영광을 모두 돌린다. 아울러 언제나 어디서나 제 편인 아내, 딸과 함께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한다. 고맙다.
<김수형의 글로벌 인사이트> SBS 김수형 기자 (제13회 조계창 국제보도상)
조계창 선배의 이름을 딴 이런 큰 상을 받게 돼서 정말 영광으로 생각한다. 워싱턴 특파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지난해 7월 귀국을 했다. 워싱턴에 있을 때는 ‘김수영의 워싱턴 인사이트’라는 이름으로 돌아와서는 ‘김수영의 글로벌 인사이트’라는 이름으로 주로 뉴미디어 콘텐츠를 중심으로 제작 했다. 물론 인터뷰를 하면 TV뉴스에 방송을 했다. 한 번 하게 되면 한 30분에서 1시간을 넘게 인터뷰를 하는데 취재한 내용들이 TV뉴스에 짧게 소개되고 좀 사장되는 게 아깝다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된 프로젝트였다.
워싱턴 특파원 생활을 할 때 코로나 팬데믹이 미국에서도 굉장히 심해 사실상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 않나 하는 약간의 좌절감으로 시작했던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위기가 기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팬데믹 시기에 화상으로 인터뷰하는 게 전 세계 취재원들이 굉장히 익숙해진 상황이었고, 한국이라는 나라 그리고 한국 매체들의 인터뷰 제안에 대해 국제적으로 저명한 인사들도 흥미를 가졌고, 한국 시청자들을 상대로 자기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데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만큼 한국 언론들의 역량도 많이 커졌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 외국에서 제작을 하다 보니까 국내에 있는 분들과 협업하는 과정들이 참 쉽지는 않았다. 회사에서 여러 가지 배려를 해줘 좋은 저희 제작진들과 함께 이런 뜻 깊은 콘텐츠를 남길 수 있게 됐다. 이게 조계창 국제보도상이라는 좋은 결실로 돌아오게 돼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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