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자협회와 보건복지부, 한국자살예방협회가 주도해 자살보도 권고기준이 제정된 지 18년이 지났다. 2004년 처음 제정된 자살보도 권고기준은 2013년 2.0, 2018년 3.0 버전으로 두 차례 개정돼 지금에 이른다. 기자협회 주도하에 만들어진 각종 보도 준칙 중에서도 자살보도 권고기준은 비교적 잘 지켜지는 편으로 꼽힌다. 그동안 유명인들의 죽음을 다루는 언론 보도가 많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일명 ‘베르테르 효과’를 유발해 자살률 증가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 각종 연구를 통해, 또 실증적으로 입증되면서 언론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커진 결과다. 기사 제목에서 ‘자살’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구체적인 자살 방법과 도구 등의 언급을 피하며, ‘동반자살’을 ‘살해 후 자살’ 등으로 쓰는 건 이제 제법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게 됐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다.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이 올해 1월부터 10월까지 자살보도 1884건을 모니터링했더니 권고기준을 미준수한 보도가 495건으로 약 4분의 1을 차지했다. 이에 재단이 권고기준 준수 협조 요청을 하자 수정된 기사는 38건으로 7.6%에 불과했다.
그럼 90%가 넘는 나머지 기사들은 권고기준을 지키지 않고 준수 요청도 거부했으니 잘못됐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단순화해서 볼 문제는 아니라고, 자살 사건을 다루는 현장의 기자들은 대체로 입을 모은다. 기자협회와 생명존중희망재단 주최로 17일 제주 서귀포 칼호텔에서 열린 ‘2022 사건기자 세미나’에 참가한 70여명의 기자들은 현장에서 겪는 딜레마들을 공유하며 보다 발전적인 자살보도를 위한 고민을 나눴다.
자살보도,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말 것인가
자살보도 권고기준은 기본적으로 ‘최소 보도’를 지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16년 연속으로 자살률 1위를 기록했고, 특히 1030세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자살예방상담전화 핫라인(1393)으로 ‘초등학생’들이 전화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다. 이런 상황에서 “자살보도를 자제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현실 왜곡이 아닌가” 하는 고민이 드는 건 자연스럽다.
이날 발제를 맡은 뉴스1의 사건팀 바이스(부팀장) 이승환 기자도 “자살보도를 최대한 자제하는 게 맞는 거냐, 이게 단순화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예컨대 ‘송파 세모녀 사건’이나 ‘최숙현 선수 사망’처럼 자살 사건을 통해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제도 개선과 대책 마련에 도움이 되는 보도도 있다. 이 기자는 “공익성과 공공적 가치와 부합할 경우 자살보도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물론 공익성을 떠나 자살 사건을 ‘클릭’ 장사에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는 때도 있다. 개그우먼 박지선씨 사망 후 경찰과 가족의 요청에 반해 유서를 공개해 비난을 샀던 조선일보 보도가 한 예다. 또한, 공인이 사망했다고 해서 자살 방법이나 도구, 시신이 병원에 이송 중인 장면까지 다 공개될 필요는 없다. 이 기자는 “사실이라고 해서 다 보도할 것인가” 물으며 “‘국민의 알 권리’인지, 국민에게 꼭 필요한 정보인지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쓰지 않은 것이 저널리즘이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자살보도 권고기준 ‘4.0’을 논할 때
이처럼 자살 사건에선 무엇을 써야 할지, 또 무엇을 쓰지 말아야 할지 항상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살보도 권고기준이 더 구체화 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승환 기자는 “스위스 언론평의회는 ‘언론인들의 권리와 의무 지침 7조9항’에서 ‘보도 가능한 자살 사건’ 6가지를 명시하고 있다”며 “가이드라인이 구체화 되면 기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보도의 역기능도 억제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밝혔다.
유현재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이제 자살보도 권고기준 4.0을 생각할 때가 됐다”고 했다. 이미 상당 부분 지켜지는 권고기준 3.0 준수를 넘어 현실에 맞게 수정·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자살을 ‘극단적 선택’ 등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재고가 필요하다고 했다. 유 교수는 “자살 용어를 쓰지 말자는 건 핀란드 모델인데, 자살이란 말을 빼니 자살률이 떨어진 결과가 나왔다. 그걸 2004년 우리 자살률이 너무 심각하니 그대로 받아들인 거다. 그땐 급성이라 빨리 수술해야 해서 그렇게 한 건데, 개인적으로 지금 우리는 만성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살이란 말을 쓰자, 쓰지 말자 하는 건 만성병에 어울리는 처방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많은 고민과 논의의 지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자살률 증감에서 언론 보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 교수는 “권고기준을 꼼꼼히 지키면 실제 자살률이 떨어진다는 증거와 연구 결과는 많다”고 했다. 특히 갑작스러운 자살 충동을 언론 기사 하나가 막을 수도 있다. 유 교수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작고 큰 넛지(사소한 개입)가 엄청난 결실을 맺게 되리라 감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했다.
“자살보도, 기자 정신건강과 유족의 공감·동의도 중요”
자살 사건을 접하고 유가족을 취재해 보도하는 건 기자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또한, 자살보도가 논란이 되면 파장은 기자들에게도 미친다. 이승환 기자는 “그래서 후배들에게 ‘기자로서 너 자신을 지키기 위해 권고기준을 지켜라’라고 말한다”고 했다.
때문에 자살보도를 어떻게 할 것이냐는 기자들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고 돕기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다. 김나래 국민일보 온라인뉴스부장(기자협회 부회장)은 현장 기자들의 고민과 판단을 적극적으로 공유해달라고 부탁했다.
김 부장은 “남의 죽음을 옆에서 보고 기록하는 일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서 취재하는 게 힘들 수 있고, 그 힘든 것에 대해서 뉴스룸의 선배들과 기자들의 교류를 통해 공감하고 이야기하는 문화가 만들어졌으면 한다”고 했다. 특히 “옛날식으로 취재하는 방식에 익숙한 데스크들은 정신건강 문제나 유족 취재 과정에서 동의와 공감의 문제에 오히려 무디지 않을까 싶다”며 “감수성 높은 현장의 기자들이 적극적으로 얘기해주면 뉴스룸의 문화나 어떤 걸 보도하고 보도하지 않을 것인가 기준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살보도와 관련해서 기자 본인도 잘 보호해야 하고, 유족들 취재할 때 공감과 동의를 얻는 걸 꼭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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