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을 읽다가 있어 보이는 외국어를 접하고 주눅이 들 때가 한 번쯤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미장센’이나 ‘클리셰’같은 표현입니다. 불어를 사용하지 않고는 이 대목을 설명할 수 없었을지 의문이 들다가 우리말 한 단어로 대체할 수 있는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아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언론계에서도 이런 외국어 표현들이 있습니다. 대부분 일본어인데 ‘하리꼬미(잠복 취재)’‘사츠마와리(경찰서 돌기)’‘야마(핵심)’와 같은 단어입니다. 특이하게 스페인어 중 선박 용어가 언론계에 정착한 사례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토에 정박 중인 상선의 출항금지를 의미하는 ‘엠바고(embargar)’입니다.
현재 언론계에서 엠바고는 시한부 보도유예를 뜻합니다. 엠바고는 기자들끼리 또는 기자들과 취재원이 정해진 기간까지 어떤 사안을 보도하지 않고 보류하기로 합의하면서 성립됩니다. 그 목적은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국민의 알 권리가 다소 침해되더라도 더 큰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보도를 통제하는 것을 취재 기자들이 예외적으로 인정하기로 하는 약속입니다.
예를 들어 납치된 국민을 구출하는 작전을 하기 위해 계획이 알려지면 안 되는 경우 국방부는 출입기자단에게 보도유예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기자단에서 이를 받아들이면 엠바고가 설정됩니다. 하지만 일단 엠바고가 설정된 뒤에도 취재원이 요청하는 보도유예의 범위가 지나치게 포괄적이거나 최소한의 기간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기자 또는 언론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들이 이에 문제를 제기하며 보도를 하면 기자단에선 엠바고가 깨졌다고 판단하고 보도유예를 해제합니다. 중대한 사건의 경우 엠바고 설정 또는 해제가 바람직했는지 논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부 기자들은 엠바고가 예외가 아닌 원칙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이들은 출입처에서 정한 엠바고를 지키는 것을 금과옥조처럼 여깁니다. 여러 출입처에서 대다수의 엠바고는 출입처 취재원이 기자들과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보도 가능 시간을 정해 보도자료를 배포합니다. 별다른 반대 의견이 없다면 묵시적, 포괄적으로 기자단이 전부 동의한 것으로 봅니다. 굳이 엠바고가 필요 없는 정보도 취재원과 기자단의 편의를 위해 즉시 보도를 선택하지 않고 유예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엠바고란 말이 외국어라 주눅이 든 걸까요? 엠바고란 말 대신 ‘보도유예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봅시다.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고선 기자라면 동의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지난 4일 밤 11시쯤 강원도 강릉의 주민들은 갑작스런 섬광과 폭발음에 놀라 공포에 떨었습니다. 대형 화재가 발생한 것 같은 장면을 찍은 영상도 SNS와 유튜브에서 공유됐습니다. 놀란 주민들은 뉴스를 통해 정보를 얻고자 했지만 관련 소식은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아침까지 강릉 주민들은 불안해 밤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이들은 섬광과 폭발음의 정체를 다음 날 아침 7시쯤에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군이 전날 밤 11시쯤 강원도 강릉의 한 비행단 사격장에서 발사한 미사일이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도발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한·미 연합이 탄도미사일 ‘현무-ⅡC’1발을 동해를 향해 쐈는데, 동쪽으로 가야 하는 미사일이 서쪽으로 약 1km 날아가 군 골프장 내에 떨어진 겁니다. 미사일 탄두가 떨어진 지점에서 700m 거리에 민가가 있었습니다. 탄두가 폭발하지 않아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오전 7시까지 관련 기사를 볼 수 없었던 건 합동참모본부(합참)가 이 미사일 사격 일정에 대해 언론에 사전에 알리면서 이튿날 오전 7시까지 엠바고를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몇몇 언론이 폭발음이 담긴 제보 영상을 공개하면서 ‘정확한 원인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취지의 기사를 내자, 합참은 엠바고가 오전 7시까지라는 이유로 기사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고, 일부 언론은 이를 수용했습니다. 엠바고의 목적이 국민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이처럼 국민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받았을 때 국민이 아닌 엠바고를 지키는 주객전도가 벌어졌습니다.
예정된 사격을 하는 중에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면 이는 엠바고와 별개의 사건이 발생했다고 봐야 합니다. 관련 정보를 통제하고자 하는 합참이 엠바고를 이유로 보도를 자제해 줄 것을 요청할 수야 있겠지만, 언론은 이를 받아주면 안 됐습니다. 반대로 합참에 발생한 사고에 대해 설명하고 취재에 응할 것을 언론이 요구했어야 합니다. 동시에 국민에게 이날 미사일 발사 일정이 있었다는 점과 군에 현재 상황을 취재 중이란 내용을 즉시 알려 불안을 해소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이 낙탄 사고는 언론이 보도하지 않는다고 해서 숨길 수 있었던 사실도 아니었습니다. 이미 SNS와 유튜브에서 사고 관련 영상이 공유돼 의혹이 커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이 존재하고 공개됐는데 보도를 미뤄달라는 건, 그리고 이를 받아주는 건 국민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이런 방식의 엠바고 운영은 과거 10여개 언론사의 보도만 통제하면 있는 사실을 없는 일처럼 만들 수 있던 시절에나 통하던 방식입니다.
이런 시대착오적인 엠바고 관행은 다른 출입처에서도 흔히 벌어집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매년 정부 예산안이나 추경안 발표 때마다 엠바고를 두고 마찰이 생기는 겁니다.
정부는 보통 예산안을 공식 발표하기에 앞서 1주일 전쯤 출입기자단에게 대략적인 규모를 설명하는 ‘엠바고 브리핑’을 진행합니다. 며칠 뒤엔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상세 브리핑’도 비공개로 진행합니다. 또 며칠 뒤에 장관이 공식적으로 발표하면 그 때 엠바고가 해제돼 미리 준비된 기사가 배포됩니다.
이런 엠바고 관행이 처음 제안되고 기자단이 이를 받아들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정부 예산안이 워낙 복잡하고 첨예한 사안이라 사전에 기자단에게 내용을 설명하고 보도를 준비할 시간을 줘서 국민에게 오해 없이 정확한 기사가 전달되도록 하고자 한 겁니다. 예산안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포괄적으로 엠바고를 설정해 확정될 때까지 추측 보도의 양산을 막겠단 의도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부 예산안에는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서 이를 사전에 접한 여러 사람들이 엠바고가 해제되기 전에 이에 대해 옹호하거나 불만을 제기하는 의견을 냅니다. 대표적으로 국회의원들이 예산안에 대해 논평을 내거나 기자들과 대화를 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을 말합니다. 정부 출입이 아닌 국회 담당 기자가 이를 통해 알게 된 예산안의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기사를 보도하는 경우가 반복적으로 발생합니다.
이런 경우 다른 출입처의 취재기자가 보도한 거지만 엠바고를 설정한 정부 출입기자단은 이 기사를 내보낸 언론사가 엠바고 약속을 파기했다고 보고 해당 언론사의 정부 출입기자를 징계합니다. 징계의 수위는 기자단이 다수결로 정합니다. ‘출입 정지’부터 출입기자단에게 피자나 치킨을 돌리는 ‘간식형’까지 다양합니다. 출입 정지가 되면 해당 출입처에서 취재를 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생깁니다.
정부와 기자단이 이런 엠바고 관행을 정착시킨 건 과거 미디어 환경에선 최선이었겠지만 현재는 상당한 괴리가 있습니다. 한국 사회의 다양한 출입처에서 새어 나오는 예산안 관련 정보를 1주일 넘는 기간에 엠바고를 통해 통제할 수 있단 생각은 깨진 독 안의 물을 손바닥으로 막아보겠단 것과 같습니다.
언론의 기본적인 기능은 알면 알리는 겁니다. 알지만 알리지 않거나 뒤늦게 알리는 건 예외적인 경우에 최소한으로 해야 하고 사후에 엠바고를 수용한 이유와 범위, 기간 등을 국민에게 알려야 합니다. 언제든 편의에 따라 보도가 유예되거나 통제될 수 있다고 국민이 여긴다면 언론은 신뢰를 얻기 어려울 겁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지금 취재 환경에서 없앨 수 있지만 관행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엠바고에 관한 논의가 더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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