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가해 없는 성범죄 보도가 어려운 기자들에게

[컴퓨터를 켜며] 박지은 기자협회보 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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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포털 사이트에 인하대 캠퍼스 내에서 발생한 성폭력·사망 사건 관련 기사들이 쏟아졌다. 최근 검찰이 준강간살인 혐의로 피고인을 구속 기소한 것을 두고 살인죄 적용 이유를 분석한 기사들이었다. ‘추락한 피해자는 가해자에 의해 떨어졌다’는 사건 현장을 조사한 법의학자의 상세한 설명을 담은 기사들을 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었다. 사건 발생 당시 벌어진 피해자에 대한 선정적·성차별적 보도가 또 다시 반복되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지난 4월 한국기자협회, 여성가족부가 펴낸 '성희롱·성폭력 사건보도 참고 수첩' 내 기사 작성 및 보도 시 점검사항 체크리스트 갈무리


인하대 사건이 처음 알려졌던 지난달 15일, 당시 거의 모든 언론사의 기사 제목엔 피해자가 발견된 상태를 선정적으로 묘사한 표현이 실렸다. 성범죄 보도 가이드라인을 만들거나 젠더데스크를 설치하는 등 성차별 없는 보도를 위해 노력한 언론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민들이 문제가 되는 기사 제목들을 일일이 캡처해 SNS상에 ‘박제’할 정도로 언론을 향한 비판이 쏟아진 사안이었다.


당시 기사들을 다시 찾아봤다. 문제가 있던 표현을 수정한 곳들이 상당했지만 그대로 방치해둔 언론사들도 여전히 있었다. 선정적 표현이 담긴 기사가 온라인에 출고된 직후 한겨레는 8분, 경향신문은 7분여 만에 데스크가 문제를 발견해 기사 제목을 수정했다고 한다. 부산일보도 보도 당일 젠더데스크의 문제제기로 잘못된 제목을 바꾸었다. 게이트키핑이 작동돼 사후에라도 고쳐져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들에겐 고민이 남는다. 세 신문사 모두 젠더를 다루는 내부 콘텐츠를 점검하는 젠더데스크라는 보직이 있고, 성범죄 보도 준칙, 젠더 보도 가이드라인 등을 만들어 구성원에게 공유한 곳들이다. 인하대 사건을 겪으며 여전히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걸 경험한 것이다.

박지은 기자협회보 편집국 기자.


김효정 부산일보 젠더데스크는 “저의 숙제이기도 한데 젠더데스크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는 결국 모든 기자가 젠더데스크처럼 돼야 한다”며 “수습기자, 주니어 기자 중심으로 교육을 진행하면서 조금씩 변화하고는 있지만, 그게 당장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지면 기사는 올라가기 전 모두 데스킹을 보기 때문에 컨트롤이 되지만, 혼자서 온라인에 올라온 모든 기사를 볼 수 없으니 뒤늦게 보는 경우가 있다”고 토로했다.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구성원의 존재는 그럼에도 중요하다. 실제로 보도 이후 이들 언론사를 중심으로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정은주 한겨레 콘텐츠총괄은 <선정적·성차별적 제목, 고백합니다> 칼럼을 통해 자사의 잘못을 밝혔고, 최근 경향신문 노조 산하 독립언론실천위원회에선 인하대 사건 기사 제목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등 자사 보도에 대한 내부 비판이 제기됐다. 한 신문사 젠더담당 기자가 “경향, 한겨레 같은 곳은 제도적으로 그 역할이 확립돼 ‘그게 문제’라고 지적할 수 있는 거다. 어떤 젠더 보도 문제에 대해 판단하고 책임지는 스피커의 활약이 앞으로도 필요하다”고 강조한 이유다.


중요한 건 앞으로 보도다. 사건기자, 데스크들에게 지난 4월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가 ‘성폭력·성희롱 사건보도 공감기준 및 실천요강’을 개정하며 제작한 ‘성희롱·성폭력 사건보도 참고 수첩’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각 조항마다 잘못된 보도사례가 나와 있고, 기자가 실제로 취재나 기사 작성 시 점검해볼 수 있는 ‘성희롱·성폭력 사건보도 체크리스트’도 제시돼 있다. 이 수첩이 기자들에게 온전히 활용돼 다시는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양산하는 보도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성희롱·성폭력 사건보도 참고 수첩 (QR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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