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아닌 무언가로… CMS 로그아웃, 또 다른 그가 깨어난다

[트렌드] '부캐' 키우는 기자들
취미 넘어 자기 성장의 디딤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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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캐 열풍’이 한동안 예능을 휩쓸었다. 래퍼 매드클라운으로 오해받는(?) 마미손, 개그우먼 김신영의 둘째이모 김다비, 국민MC 유재석을 닮은 프로듀서 지미유와 유야호, 유팔봉까지. 부캐(부캐릭터)는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비단 유명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부캐를 만들고 가꾸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를 가리키는 ‘사이드 프로젝트’, ‘N잡러’ 같은 용어도 심심찮게 쓰인다. 단순히 돈을 더 벌기 위한 부업 활동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못다 이룬 꿈 때문에, 자기계발을 위해, 혹은 자아를 지키려는 방편으로 N잡러가 되거나 부캐를 가꾸는 이들이 있다. 기자도 예외는 아니다. 취미 수준을 넘어 부캐를 통해 일과 자신의 성장을 동시에 꾀하는 기자들을 만나봤다.

‘심야식당’처럼 걱정 나누는 커뮤니티 공간 주인장

종합일간지 A 기자가 운영하는 커뮤니티 공간에 누군가 남기고 간 쪽지 한 장.

종합일간지 A 기자는 서울 홍대 인근의 작은 가게 주인장이다. 겉보기엔 술집이지만, “가게의 아이덴티티는 커뮤니티 공간”이다. 2018년, 9년차 기자였던 그는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따져보다가 공간에 대한 애착이 크고 낯선 사람을 만나 얘기하는 걸 좋아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일본의 인기 만화 ‘심야식당’을 떠올리며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었다. 심야식당의 마스터처럼 맛있는 음식을 내놓진 못하지만, 고민을 듣고 나눌 수는 있었다. 인스타그램에 ‘오늘의 걱정 주제’를 올려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앞머리 자를까 말까 걱정’부터 ‘지금까지 낸 축의금이 수천만원인데 못 받을 것 같다’ 같은 고민까지 다양했다. 기자 일을 하며 정치인 등 유명인을 주로 만났던 그에게 평범한 사람들이 털어놓는 고민과 이야기는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기사를 풍성하게 해야지’ 생각해서 차린 공간은 아니었는데, 기사 쓰는 데도 도움이 되고 좋은 점이 많이 있더라고요.”


1년가량 이렇게 운영되던 ‘걱정모임’은 코로나19 장기화로 중단된 상태다. 그래도 가게 문은 열려 있다. 그가 업무나 약속 때문에 자리를 비울 땐 무인으로라도 운영한다. 돈 벌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망해서도 안 된다. 이 공간을 지키는 게 그에겐 너무나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인건비가 안 들어 하루 3만원 이익이 나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구조”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가게를 하는 게 기자 업무에 플러스가 되면 됐지, 소홀한 적 없다고도 자신한다. 그런데도 익명으로 인터뷰에 응한 건 혹시라도 이 공간을 운영하는 데 지장이 생길까 해서다. 그는 “부산일보의 ‘산복빨래방’ 프로젝트처럼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을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은 중요하다”면서 “(코로나19) 상황이 나아져서 언젠가 다시 걱정모임을 하는 커뮤니티 공간으로 열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반복되는 루틴에서 돌파구를 찾는 5년차 북튜버

정지혜 기자는 주로 ‘자기 성장’을 주제로 책을 낭독하거나 북토크 등을 진행하고 있다.

정지혜 세계일보 기자의 부캐는 ‘북튜버’, 부캐명은 ‘졔졔’다. 2018년 1월1일 팟캐스트를 시작해 5년째 ‘고품격 책수다 방송 낭독중독’의 책방지기로 활동 중이다. 자기 성장 등을 주제로 책 리뷰와 낭독 영상, 북토크 등을 각종 오디오 플랫폼과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어릴 때 꿈이 라디오 진행자였거든요.” 하지만 라디오 DJ에 공채 시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있는데 누가 써줄 리도 없었다. “일단 직업을 갖고 유명해진 사람들이 하는 거구나 싶어서 가볍게 연습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죠.” ‘노후 대비’ 차원이기도 하다. 또래의 기자들처럼 그 역시 평생 기자를 할 거라고 생각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방송이 기자 일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기자 일을 하다 보면 계속 반복되는 루틴 같은 게 있잖아요. 기사도 항상 같은 범위 안에서 쓰는 것 같아 발전이 없다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확실히 이걸 하고서는 기사를 쓰는 일 자체도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고,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 같아요.”


기회가 되는 대로 팟캐스트며 유튜브며 하고 있지만, 구독자가 많아서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당장 라디오에서 섭외가 올만큼 명성을 얻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계속 하는 건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면서 어떻게 차별화가 가능할까 생각하면 답이 안 나오거든요. 그렇게 10년, 20년이 지나면 막막할 것만 같았죠. 뭔가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취미 이상으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비슷한 돌파구를 찾는 기자들에게 전하는 작은 팁 하나. 네이버나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면 무료로 이용 가능한 스튜디오와 녹음·촬영 장비가 있다고. 정 기자는 말했다. “길이 있습니다.”

부캐와 함께 성장하는 ‘4년차 고기자’

4년차가 되어도 여전히 종종 고뇌하고 갈등하는 고양이 기자 ‘고기자’.

기자 사회에서 유명한 부캐로 ‘고기자’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019년 인스타툰 ‘고기자의 수습생활’로 데뷔(?)한 고양이 기자 ‘고기자’는 이제 어엿한 4년차 기자로 성장했다. 기자협회보에 ‘고기자의 취재수첩’을 연재 중이고, 언론 인터뷰에도 몇 번 응한 적 있지만, “믿을 만한 몇”을 제외하면 누구도 고기자의 ‘진짜 정체’를 모른다. 언젠가 직장인들의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 언론인 라운지에 고기자의 정체를 묻는 글이 올라온 적이 있는데, ‘지켜주자’는 댓글이 달렸다고 한다. 고기자는 이제 ‘창조자’의 부캐만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모든 기자의 부캐이기도 하다. 고기자는 “실제로 ‘고기자’가 겪은 일은 저 혼자만이 겪은 일이 아니고, 많은 주변의 경험담에서도 기인한다”면서 “기자라면 모두가 가질 수 있는, 그런 어떤 보편성이 있는 부캐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고기자는 ‘본캐’의 해우소 역할을 톡톡히 한다. 고기자는 “말하기 어려운 고민들, 그리고 함께 이야기했던 고민들을 풀어놓다보면 조금은 정리가 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바이라인’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데스킹을 거치지 않아도 되는, ‘진짜 내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좋다”고 말했다. 어느덧 1500명이 넘는 팔로워를 둔 고기자는 가을 전 출간을 목표로 에세이책도 쓰고 있다. 그는 “고기자가 걸어온 수습, 1년차, 2년차, 그리고 n년차의 길을 누군가 다시 걸을 때, 고기자를 보고 외롭지 않았으면 한다”며 “고기자 역시 기자로서 늘 새로운 날을 맞고 있는 만큼, 조금 더 오래 지속하기 위해서 노력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인스타 계정만 7개, 부캐로 자기 브랜딩 꿈꾼다

손성원 기자가 사이드 프로젝트로 운영하는 인스타그램 계정. 그의 부캐명은 ‘에코’다.

손성원 한국일보 기자는 인스타그램 계정만 7개다. 회사, 교회 사람들과 소통하는 주 계정 외에 요가, 웰니스, 독서 등 취미나 관심사와 관련된 계정도 여러 개다. 그 중 사이드 프로젝트로 만든 계정에선 ‘에코’라는 활동명을 쓰고, 자신을 ‘디지털 크리에이터’로 소개한다. 그는 “부캐를 어떻게 하면 잘 개척하고 굴릴 수 있을지” 노하우를 얻고 공유하는데 관심이 많다.


그의 본캐와 부캐를 딱 잘라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요가 강사 자격증을 준비하는 손성원도, 각종 독서모임과 커뮤니티 모임을 주도하는 손성원도, 그의 부캐인 동시에 본캐다. 이젠 일과 삶을 분리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 보다 일과 삶이 융합된 워라블(Work-Life Blending)이 중요한 시대라지 않나. 지난 2월부터 ‘마음치유’를 주제로 글을 쓰고 뉴스레터를 만드는 손 기자에게 그의 취미나 부캐 활동은 일과 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예전이랑 다른 게 브랜딩이 저를 먹여주지, 평생직장이 저를 먹여주는 게 아니잖아요.” 그는 “어떻게 하면 영리하게 나의 미래를 꾸려갈 수 있는지 부캐를 통해 배운다”고 했다. “전통적인 출입처 기자는 제너럴리스트라고 하잖아요. 부캐는 내가 어떤 분야에서 스페셜리스트가 될 수 있는지 가능성을 두드려 볼 수 있는 디딤돌 같은 느낌이에요.” 이는 “자기 효능감을 쌓는 과정”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요즘처럼 기자로서 자존감을 지키고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울 때는 더욱 그렇다. “만약 제가 출입처 부서에 있었으면 누가 단독 한 줄 내는 거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애썼겠죠. 지금은 넓게 보고 어떻게 제 영역을 더 확장해 갈지에 관심이 있습니다.”

부캐가 본캐 될 날을 꿈꾸는 7년차 웹소설 작가

13년차 기자이면서 7년차 작가인 문영수 기자는 지금까지 4편의 웹소설을 발표했다.

문영수 아이뉴스24 기자는 7년차 웹소설 작가다. 2016년 필명 ‘무정영’으로 데뷔해 발표한 작품만 4편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뭔가를 쓰고 있다. 퇴근 후나 휴일은 물론 이동하는 중에도 쓰고 또 쓴다. 기자로 일해온 13년 중 절반 이상을 꾸준히, 성실하게 글을 써왔다. 그는 “집필을 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면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단순한 취미 생활이었어도 쉽지 않았을 일이다. 작가는 원래 그의 꿈이었고, 그 꿈이 성실함의 원동력이 됐다. “기자는 엉덩이가 무거우면 안 되고 발이 빨라야 하잖아요. 반면 작가는 엉덩이가 무거워야 하거든요. 한번 앉으면 진득이 써야 하죠. 결국, 성실함이 작가의 가장 중요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실함이 항상 부와 명성을 안겨주는 건 아니다. 흔한 말로 “치킨값도 못 벌었다”고 할 만큼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인세 등의 수익은 기대에 못 미칠 때가 많다. 그래도 “무명배우가 어느 순간 터지듯 작품을 쌓아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터질 거란 믿음을 갖고 꾸준히” 쓴다. “지금은 기자가 본캐고 작가가 부캐인데, 궁극적인 지향점은 둘이 바뀌는 거예요. 물론 작가가 잘 된다고 해도 기자를 그만두진 않을 거 같아요. 기자 일이 작가 생활에도 도움이 되는 게 있거든요. 아직은 부캐가 작가지만 나중엔 작가가 본캐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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