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자협회가 실시한 ‘2021 기자의 세상보기’ 공모전에 당선된 우수상 3편을 기자협회보 온라인에 싣는다. 1편 주동일 뉴스웨이 기자의 <시계에서 시대를 읽다-시계 담당 기자의 시계 수리 학습기>에 이어 2편은 김성호 파이낸셜뉴스 기자의 <자식 잃은 어머니는 어떻게 투사가 되는가>이다.
이제 막 2020년이었다. 교통사고로 몇 달간의 입원을 뒤로하고 나는 복직을 앞두고 있었다. 지루한 병동생활의 끝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새해였으므로,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한 인연들에게 안부를 묻기로 했다.
이나금 어머니와는 딱 한 번 만난 인연이었다. 2019년 5월 보도한 인터뷰 때문이었다. 취재 차 국회를 찾은 때였다. 너무 지쳐보였기 때문일까.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하던 어느 장년 사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더위에 지친 듯 피켓에 기대섰던 그는 낯선 이의 물음을 반갑게 여겼다. 며칠을 오랜 시간 서 있어도 말을 걸어오는 이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딸을 잃은 아버지였다. 어느 대학병원에서 20대이던 젊은 딸을 잃고서 잠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의료사고가 의심됐지만 지식도 없고 CCTV 영상도 없어 따질 수가 없었다고 했다. 그와 헤어지고 며칠이 지나도록 그의 한 맺힌 억울함이 가슴 한편에 남았다. 인터뷰를 결심하고 그가 속한 단체에 연락했다. 그렇게 소개받은 이가 이나금씨였다.
국회 앞에서 1인시위 하던 시민에게 말 걸다
이씨는 2016년 아들을 잃었다고 했다. 군에서 전역하고 경희대학교 3학년으로 복학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던 때였다. 스물다섯 권대희씨는 직접 찾은 서울 한 성형외과에서 변을 당했다.
권씨가 병원을 찾은 건 사각턱을 다듬는 안면윤곽수술을 위해서였다. 학창시절부터 콤플렉스였다고 했다. 대구에 있던 부모,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형에겐 알리지도 않았다. 함께 살다시피 하던 대학교 동기에게도 수술 며칠 전 계획을 털어놓은 게 고작이었다.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대희씨는 수술 중 과다출혈로 중태에 빠졌고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대학병원 응급실로 이송된 건 수술 후 한참이 흐른 자정께로, 이송 후에도 상태가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꼬박 49일을 버티다 숨을 거뒀다.
아들이 떠난 뒤 이나금씨는 사건을 파고들었다. 병원 의료진이 “법대로 하라”며 내몰아서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했다. 믿을 건 어렵사리 확보한 수술실 CCTV뿐이었다. 무서웠다고 했다. 떠나간 아들이 수술대 위에 벌거벗고 누운 그 영상을 지켜보기가 두려워서 재생버튼을 누르고 잠시 보다가 다시 멈추기를 반복했다고 했다.
장장 십 수 시간에 이르는 CCTV 영상엔 충격적인 내용이 가득했다. 집도의로 보이는 사내는 뼈만 절개하고 수술실을 나갔다. 이내 다른 의사가 들어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도 수술실을 나가버렸다.
경찰 수사에선 당시 병원이 동시에 3명의 환자를 수술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진다’던 집도의는 환자가 마취되면 뼈를 절개하고는 다른 수술실로 옮겨갔다. 그 대신 수술을 이어받은 의사는 20대로, 모 대학 의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한 지 갓 6개월이 지난 의사였다. 그가 수술 상당 부분을 책임진다는 걸 환자들은 사전에 알지 못했다. 마취과 의사 역시 수술실을 오가야 했으므로 각 환자가 어떤 상태인지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다. 소위 공장식 유령수술이었다.
대희씨는 방치됐다. 수술대를 타고 뚝뚝 떨어진 피가 바닥에 흥건해지자 수술실에 있던 간호조무사들이 대걸레를 가져와서는 쓱쓱 밀어 닦았다. 그렇게 닦은 것이 열 차례가 넘었다. 나중에 전문 감정기관들은 이씨가 수술 중에 흘린 피만 3500cc에 이른다고 판단했다. 치사량이다.
대희씨는 이 병원에서 단 한 차례도 수혈을 받지 못했다. 명백한 의료사고며, 의료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사건이었다.
이씨는 확보한 의무기록지와 수술실 CCTV 영상을 비교분석해 의료진의 주장 하나하나를 반박했다. 의료진이 혈액대체제를 주사했다는 시간과 횟수 모두가 거짓이었다. 의료진이 전부 수술실을 비운 시간도 30분이 훌쩍 넘었다. 권씨 상태가 위중하다는 걸 알고서도 큰 병원으로 바로 이송하지 않고 지체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이씨는 직접 의료진을 찾아가 따져물었다. 전문가들에게 감정서를 보내 답을 구하기도 했다. 적잖은 시간과 돈이 들었으나 이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 수사는 2년 가까이나 걸렸는데, 이씨는 수사관보다도 열심이었다. 끊임없이 영상을 돌려보고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면 경찰에 전달했다.
기소의견으로 넘긴 사건 8개월째 묵힌 검찰
이씨와 내가 처음 만난 2019년 5월은 경찰 수사가 마무리되고 검찰의 기소를 기다리는 시점이었다. 검찰은 경찰이 기소의견으로 넘긴 사건을 8개월째 묵히고 있었다. 취재해보니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경찰이 기소의견으로 송치한 혐의 중 핵심적인 부분을 검사가 빼라고 요구했다는 증언까지 있었다.
3시간가량 이어진 인터뷰는 특별했다. 의료사고 사건에서 전문가집단인 의사들이 얼마나 특권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지, 그로부터 억울한 피해자가 어떻게 양산되는지가 보였다. 환자 마취 뒤 의료진이 이 수술실, 저 수술실을 오가는 이른바 공장식 유령수술은 비단 이 병원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환자가 사망한 뒤에도 “법대로 하라”며 유족을 내모는 의료진의 이야기도 의료사고 사건마다 반복되는 것이었다.
차이는 수술실 CCTV를 확보했다는 점이다. 수사기관과 의료계 관계자들은 이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발생한 첫 번째 의료사고였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았다. 과거 의료사고를 겪은 곳이라면 절대로 CCTV를 원본 그대로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라고, 경찰 수사가 시작되고 압수수색이 이뤄진 뒤 일부 삭제나 편집된 본을 내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여러 의료사고 유족을 취재한 지금까지도 나는 이씨처럼 CCTV 원본을 그대로 확보한 유가족을 만나본 일이 없다.
처벌도 문제였다. 통상 수술로 환자가 사망하거나 중태에 빠진 사건은 업무상과실로 처리된다. 처벌수위는 높지 않다. 환자 마취 뒤 의사를 바꾼 유령수술 사건들도 마찬가지다. 상해나 살인이 아닌 과실이란 것이다. 법조계에선 초범인 만큼 집행유예를 받을 거라고 내다봤다. 의료법 위반 없이는 의사면허를 단 하루도 정지시킬 수 없는 게 이 나라 법이었다.
의료진은 당당했다. 과실은 있지만 중대한 잘못은 아니라는 식이었다. 충격적 내용으로 가득한 영상을 내주고도 오랫동안 “문제될 것 없다” “다들 이렇게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어쩌면 진심으로 큰 잘못은 아니라고 믿었을지도 모른다.
이씨와의 인터뷰는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 인터뷰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통사고로 장기입원을 하게 된 내가 퇴원 즈음에 문득 전화를 건 걸 보면 말이다. 전화하기 전 찾아본 언론 보도에선 검찰이 송치 1년 만에 사건을 재판에 넘겼고, 병원 원장에 대해 구속영장까지 청구했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잘 풀렸구나’ 가벼운 마음이었다.
반년 만에 통화한 이나금씨는 괴롭다고 했다. 담당 검사가 핵심 혐의를 모두 뺀 탓에 의료진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관심 갖는 언론도 없고 보도된 기사도 검찰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이 나갔다며, 괴롭고 억울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고 했다.
퇴원하자마자 이씨를 만났다. 당시 내 부서는 생활경제부로, 난 식품과 프랜차이즈 업계를 담당했다. 복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가 세상을 떠나 이씨와 만난 건 그 장례식장 인근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직접 기사를 낼 생각은 없었다. 통화한 이씨의 상태가 우려스러웠기에 만나 진정시키고 알고 지내는 사회부 기자들을 연결해주겠다는 심산이었다.
만남 뒤 나는 타사 기자들과 시민단체들을 찾아다녔다. 열흘 동안 접촉했지만 긍정적인 답을 해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의료사건이라 다루기 어렵고, 이미 다른 언론 여럿이 다룬 바 있으며, 검찰이 기소까지 해서 문제 삼을 부분이 없다는 등의 이유였다. 개별 기자가 다뤄주기로 약속했으나 데스크에서 막힌 경우도 있었다.
직접 사건을 다룬 건 그래서였다. 운이 좋아 토요일자는 부서 경계를 넘어 보도할 수 있었으니, 조금 곤란하긴 해도 아예 자격이 없는 건 아니었다.
2020년 1월27일부터 1년가량 50편이 넘는 기사를 썼다. CCTV 영상을 분석해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문제를 다뤘으며,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비판하고 합리적 의심들을 제기했다. 공판을 찾아 재판상황을 알렸고 마음을 추스른 이씨가 1인 시위에 나서는 과정도 곁에서 가까이 보도했다. 이씨뿐 아니라 대희씨 아버지와 형, 가까운 친구들도 인터뷰했다. 수사기관 관계자와 시민단체 도움도 컸다. 운이 좋아 몇몇 보도가 호응이 있었고 다른 언론의 보도로까지 확장됐다.
어려움도 있었다. 온갖 요청에도 빤한 대답만 내놓던 검찰이 정정보도와 반론보도 요구를 해왔다. 의료계에서도 내용증명이 날아들었다. 부서 경계를 넘는 보도에 회사에서도 말이 나왔다. 원고지 20매가 넘는 기사에 온통 빨간 줄이 그어지고 4매짜리 단신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보다 더 고된 싸움을 하는 이가 있었다. 매일 같이 법원과 검찰, 국회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던 60대 여성, 자식을 잃고 마음까지 너덜거리던 어머니가 홀로 서 있었다. 하루하루 위태롭던 그녀의 눈빛에 어느 순간 빛이 돌았고, 자기 사건만이 아닌 다른 이와 세상까지 돌아보고 있었다.
"모든 환자들은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익이 있다"
지난해 10월, 법원은 검찰의 의료법 위반 혐의 불기소 결정이 부당하다며 재정신청을 인용했다. 1000건 중 3건 정도만 인용된다는 좁은 문을 뚫고서 권대희 사건 재정신청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나는 이씨가 아들을 잃은 뒤 걸어온 5년 중 고작 1년 반을 함께 했다. 고단하고 버거운 싸움이었다. 이씨는 이제 제 사건을 넘어 이 땅의 모든 환자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권익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병원 수술실에 CCTV를 달고 의료사고가 일어나면 받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환자를 속이고 권한 없는 의사가 대신 수술을 하면 과실이 아닌 상해로 다뤄야 한다고 말한다. 강력범죄를 저지른 의사의 면허를 규제하고, 성범죄 등을 범한 이들의 이력을 환자가 알 수 있게 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국회가 의료계의 의견을 받아 수술실 대신 수술실 입구에만 CCTV를 달자고 하니, 매일 아침 국회로 나가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인다. 아예 의료정의실천연대란 단체를 설립해서는 의료계 이익단체에 맞서 환자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활동까지 벌이고 있다. 제 자식, 제 가족만 생각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일이다.
지난 1년 새 이씨는 어엿한 활동가가 되었다. 피해유족으로 절망하고 울부짖던 그가 다른 이를 돌보고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고 섰다.
이씨만이 아닐 것이다. 세월호 침몰참사와 가습기살균제 참사, 김용균씨 사망으로 촉발된 산업재해 사건들도 자식 잃은 부모를 거리의 투사로, 시민사회 활동가로 만들었다. 그 과정은 얼마나 고되고 험난했을까.
자식 잃은 부모가 무거운 짐을 지고 2021년 대한민국을 가로지른다. 그 어깨 위에 실린 짐 가운데 우리 언론의 몫이 결코 가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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