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자협회가 실시한 ‘2021 기자의 세상보기’ 공모전에 당선된 우수상 3편을 기자협회보 온라인에 싣는다. 1편은 주동일 뉴스웨이 기자의 <시계에서 시대를 읽다-시계 담당 기자의 시계 수리 학습기>이다.

쇠로 만든 심장이라 불리는 시계 동력장치 무브먼트 모습.

“어떤 시대든 그 시대를 담은 문학적 풍경화를 가지게 되는데 이러한 풍경화로서의 소설에는 결론이나 당위가 없다. …가감 없이 자연스럽게 묘사한다는 것이 이 작품이 가진 강렬한 매력이다.”

구제 옷 도매상을 방문한 20대들의 삶을 그린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구제, 빈티지 혹은 구원’에 대한 평이다. 해당 심사평을 보면서 특정 사건이나 사물,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이들을 묘사하다 보면 그 시대만의 특성이 드러난다는 걸 배웠다.

실제로 물건의 역사엔 사람들의 부단한 삶이 녹아있다. 리바이스 청바지의 데님 원단과 내구성을 높여주는 구리 리벳엔 당시 탄광촌 노동자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지금으로서는 용도조차 짐작하기 힘든 코인포켓(워치포켓)에선 조끼 주머니에 넣어둔 회중시계가 깨질 정도로 거칠게 일했던 1800년대 카우보이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해시계에서 회중시계, 손목시계, 로얄 오크까지

시계에도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담겼다. 해시계를 사용했던 인류는 일정한 눈금을 매긴 양초에 불을 붙여 밤에도 시간을 재는 방법을 고안했고, 이후 추를 통해 동력을 얻는 건축물에 가까운 거대한 기계식 시계를 만들어냈다. 점점 작아진 시계는 탁상시계로 발전해 여러 사람의 필요를 반영하면서 여러 모습으로 변화했다. 화려하게 장식한 시계는 귀족들의 권력을 상징했고, 크로노미터 기능을 갖춘 해상시계는 수많은 선원의 목숨과 상인들의 재산을 지켰다.

세계대전으로 손목시계가 보급되면서 사람들은 회중시계를 주머니에서 꺼내는 대신 손목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을 알 수 있게 됐고, 시계추를 대신하는 로터를 통해 팔을 흔들며 걷기만 해도 동력이 채워지는 자동태엽 시계가 탄생했다. 스마트 기기가 보급된 요즘, 시계는 럭셔리 시장에서 시간 대신 사람들의 욕망과 가치관을 나타낸다. ‘셀프 메이드’라 불리는 자수성가를 덕목으로 삼는 20대 힙합 키드들이 ‘몰락한 왕의 귀환’이라는 스토리를 담은 오데마피게의 ‘로얄 오크’를 몇 년 전부터 선망하기 시작한 게 대표적인 예다.

이 때문인지 현재 시각을 나타내는 기계인 시계에선 역설적으로 인류의 기나긴 과거를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양 산업으로 꼽히는 시계에 여전히 독자들에게 소개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있는 셈이다. 기자가 된 뒤 시계 코너를 만들어 출입처에 상관없이 관련 기사를 써온 것도 이 때문이다.

2019년 처음 시계 코너를 운영하기 시작할 때, 실력이 부족한 마당에 취재까지 어설프게 하진 말자고 다짐했다. 수많은 부품의 기능을 정확히 알아가면서, 어떻게 시계가 각 시대에 맞게 변화했는지 알기 위해 퇴근 후 종로 세운스퀘어에서 시계 수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영국박물관에서 시계 복원가가 된 오승현 제임스 안티크 사장의 추천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 수리 학원인 국제시계연구원으로 향했다.

MOI워치 심화 과정 실습 장면

종로에서의 첫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첫 난관을 맞닥뜨렸다. 시계 수리의 기초라는 드라이버와 핀셋 관리가 여간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일자 드라이버의 양면을 같은 각도로 평평하게 갈아야 했지만, 손질한 드라이버의 면은 칼로 깎은 연필심처럼 제각각이었다.

드라이버를 포기하고 핀셋을 집어 숫돌 격인 디스크 앞에서 한참을 씨름했지만, 부품을 집는 핀셋 끝의 각은 도무지 같아지지 않았다. ‘장비 탓은 하수나 하는 거지’라며 자기합리화 끝에 부품을 집어봤지만, 제대로 갈리지 않은 핀셋으론 나사 하나 제대로 집을 수 없었다. 특히 크기가 작은 나사는 균일한 악력을 받지 못하고 책상 밖으로 튀어 날아갔다.

말 그대로 ‘티끌만큼’ 작은 시계 부품을 집고 조이려면, 섬세한 장비 관리는 필수라는 원장님의 설명이 이어졌다. 한때 금은방에선 새로 들어온 시계 수리공의 실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평소에 손질한 드라이버를 확인했을 정도라고. 이 때문에 지금도 일부 럭셔리 브랜드에선 시계 수리 기술자를 채용할 때 드라이버 관리를 테스트한다.

첫날부터 드라이버는 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수많은 시계를 망가뜨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동력장치인 무브먼트를 잡기도 전에 드라이버를 망칠 줄은 몰랐다. 등 뒤에선 자상하기로 소문난 원장님의 탄식 소리가 들렸다.

“일을 한 번도 안 해봐서 그런가, 드라이버 갈랬더니 송곳을 만들어왔네 허허.”

한참을 씨름한 끝에 마침내 그럴싸하게 손질된 드라이버가 탄생했다. 여전히 미흡했지만, 핀셋도 나사를 집을 수준으로 갈았다. 그제야 시계를 잡을 수 있었다. 가슴 높이만큼 올라온 테이블 위에서 용두를 제거해 케이스를 분리하고, 흠이 가지 않도록 비닐을 덮어 핸즈(시곗바늘)를 제거한 뒤 다이얼을 떼어내면 그동안 숨겨져 있던 무브먼트가 얼굴을 드러낸다. 무브먼트는 수많은 부품을 제각기 다르지만 고른 속도로 차분히 움직였다. 쇠로 만든 심장이라 불리는 무브먼트 수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크라운은 '용두', 세팅레버는 '압조', 클러치 레버는 '비녀장'

국제시계연구원은 시계 부품의 이름을 모두 한글로 가르친다. 크라운은 용두, 세팅레버는 압조, 클러치 레버는 비녀장, 클러치 휠은 장구통차, 캐넌 피니언은 통소차로 부른다. 시계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자주 쓰이는 ‘랫챗휠’은 ‘대권차’로 순화한다.

원장님은 “우리나라에 시계 수리 기술이 들어온 시기가 일제 강점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일부 건설 현장에서 건설 장비와 도구를 일본어로 부르듯, 과거 우리나라 시계 수리 기술자들도 대부분의 시계 부품을 일본어로 불렀다.

하지만 우리말로 시계 수리를 가르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대표적인 시계 교육 기관인 국제시계연구원은 이를 받아들여 순화한 부품명으로 수강생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인지 국제시계연구원의 수강생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담백하기 그지없다. “여기 압조를 뺀 다음에 용두를 꺼내고, 비녀장을 분리하시면 돼요” 같은 식이다.

시계 분해-조립 연습

다이얼과 맞닿는 ‘이면 장치’ 수리를 끝낼 즈음, 국제시계연구원의 교육 기간이 끝났다. 직장생활과 병행하면서 수업에 빠지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 정해진 교육 기간을 한참 넘기게 된 것이다. 원장님께선 계속 공부하러 와도 괜찮다며 배려해주셨지만, 이미 반년 가까이 기한을 넘긴 상태에서 계속 얼굴을 비추기엔 송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은 잦은 결석으로 분위기를 흐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도 컸다.

그러던 중 국내 유명 시계 제작자인 김한뫼 MOI워치 대표로부터 시계 수리를 마저 배워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김 대표는 세계 최대 시계 박람회로 꼽히는 바젤월드에 다양한 시계를 선보이면서 많은 시계 기술자를 배출한 ‘장인’이다. 특히 나전칠기 무형문화재 보유자에게 감입 기법을 배워 ‘자개 시계’를 제작하는 등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담은 시계를 만들어 이반 아르파 등 세계적인 시계 제작자들과 협업한 바 있다.

MOI워치에선 기본 과정과 심화 과정을 거쳐 ETA6497과 ETA2892 오버홀(분해 수리)을 배웠다. 유학이나 취업을 위해 보다 많은 공부를 원하는 이들은 고급 과정과 전문가 과정을 통해 ETA7750과 롤렉스 3135 무브먼트 오버홀을 배울 수 있다.

실제로 MOI워치에선 시계 기업에 취업하거나 세계적인 시계 수리학교 보스텝에 들어가기 위해 수리를 배우러 온 이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취미로 수업을 듣는 경우도 많지만, 최근엔 직장생활에 불안감을 느끼고 기술을 배우기 위해 시계 수리를 배우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 수강생은 “대기업을 다니고 있지만 별로 전망이 없다고 느껴 수리와 감정을 배우러 왔다”고 말했다. 그는 쉬는 시간에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시계 재테크’ 이야기를 하던 중, 자신이 월급을 모아 주식 투자 중이라며 혹시 괜찮은 종목이 있냐고 묻기도 했다.

수업 중에 사용한 무브먼트를 만든 ETA는 스위스 그렌첸에 위치한 시계 무브먼트 제조기업으로, 대다수 시계 제조사에 무브먼트를 공급한다. 1970년대 건전지를 사용해 제작 비용을 낮추고 정확도를 높인 쿼츠 무브먼트가 보급되면서, 기존의 기계식 시계를 생산했던 많은 시계 기업이 문을 닫거나 재정난을 겪었고, ETA는 이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으로 안정적인 품질의 무브먼트를 공급하면서 시계 시장에서 입지를 높여갔다.

"오늘부터 시계 발골 전문가가 되겠습니다"

여느 기계들과 마찬가지로 시계 무브먼트 오버홀 역시 분해와 세척, 수리를 거쳐 분해의 역순으로 다시 조립하면서 마무리됐다. 문제는 여느 기계들과 마찬가지로 분해 과정은 쉽고 재밌지만 조립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에 빠지며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한다는 점이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지만, 나사가 날아가는 바람에 그마저도 마음 놓고 쉬지 못했다. 시계의 태엽을 잡아주는 밸런스 스프링은 조금만 힘을 줘도 늘어났다. 화를 낼 새도 없이 손끝의 미세한 감각에 집중해야 했고, 완성된 시계가 작동하지 않을 땐 치밀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고 다시 무브먼트를 분해했다. 시계 수리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정적 속에 수강생들의 탄식과 나지막한 욕설이 간간히 들려오는 이유다.

“대표님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시계 발골 전문가가 되겠습니다. 수강생 여러분은 꼭 예지동으로 가세요. 저는 마장동으로 떠나겠습니다.”

멋쩍은 마음에 농담을 던졌지만, 감긴 태엽이 풀리며 바퀴들이 돌아가는 순간엔 분명한 희열을 느꼈다. 초침이 빠르게 회전하는 작은 소리만으로도 정적이 깨졌고, 그제야 고요한 스튜디오의 시간이 움직이는 듯했다.

MOI워치 기본 과정 실습(사진 왼쪽), MOI워치 시계 수리 과정 수료증

한 달 뒤 테스트를 거쳐 심화 과정을 마치고 수료증을 받았다. 그 새에 수리 매뉴얼을 몇 장 봐서인지, 어지간한 시계 설명글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새로운 소재와 기술을 적용한 시계들을 볼 때면, 스마트폰이 보급된 시대에도 기술자들의 열정이 이어진다는 생각에 왠지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주위에선 인사치레로 대단하다고 말해줬지만, 주로 재밌었겠다는 반응이었다. 가끔은 굳이 수리까지 배워야 했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 그땐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실제로도 기자로서 텍스트를 넘어, 한 번쯤은 특정 현장의 면면을 오랫동안 지켜봤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싶다. 구제 의류에 대해 썼던 한 단편소설처럼, 작고 사소한 분야일지라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적다 보면 그 안에 나름대로 현 시대의 단면이 그려질 것이라고 여전히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계 수리 수업을 통해 배운 건 시계를 통해 시대의 단면을 읽는 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주동일 뉴스웨이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