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 언론이 '질투의 날'에 분노한 이유

[글로벌 리포트 | 핀란드] 최원석 핀란드 라플란드 대학교 미디어교육 석사과정

최원석 핀란드 라플란드 대학교 미디어교육 석사과정

▲최원석 핀란드 라플란드 대학교 미디어교육 석사과정

해마다 11월1일 찾아오는 ‘질투의 날’에 핀란드 언론이 분노했다. 중대한 이유가 있다. 이곳 언론은 일제히 전년도 고액 납세자 명단을 기사로 쓴다. 기자들은 국세청이 편의상 제공한 연 소득 10만 유로(한화 1억3000만원) 이상 명단을 토대로 주요 고소득자 면면을 소개하고 그 배경도 분석한다. 게임 클래시오브클랜과 브롤스타즈를 만든 슈퍼셀(Supercell) 창업자 일카 파나넨을 비롯한 게임 업계 CEO, 스포츠계와 연예계 스타, 또 여러 사업가가 주로 순위권에 오른다. 돈 많이 번 사람 명단을 보고 질투심 솟는 날이란 별명이 붙기는 했지만, 이날은 핀란드의 투명한 납세 문화와 조세 정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날이란 의미가 있다.


그런데 2020년에 납세자 명단은 예전보다 불투명했다. 지난해 가장 소득이 높았던 고액 납세자 4400여명이 명단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국세청은 ‘개인적인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언론 공표 명단에서 신청자 이름을 제외해 주었다. 재정적 이유, 건강 문제, 범죄 대상화 우려 등의 사유가 포함되었다. 국세청은 2019년부터 공표를 거부하는 사람의 요청을 심사해 명단에 반영했다. 지난해에는 명단 제외 요청 600건 가운데 231건만 승인했는데 올해는 4600건 가운데 67건만 제외하곤 공표 거부 요청을 받아들였다. 유럽연합 일반 개인정보 보호법(GDPR)과 관련 핀란드법에 근거를 둔 것이라곤 하나, 요청을 수천 건이나 승인한 건 국세청의 판단이었다. 언론이 가만히 있을 수 없던 이유다.


핀란드 기자협회장 한네 아호(Hanne Aho)는 “국세청 방침은 사회 투명성에 반하는 행동이다. 핀란드인은 누가 경제 권력을 누리는지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 납세 정보는 임금과 소득에 관한 논의에 투명성을 부여한다”고 지적했다. 또 “국세청의 유럽 정보 보호법 해석을 기준으로 다른 기관 또한 사회적으로 중요한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막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럽연합 차원의 개인정보보호 규제에 관한 명확한 사회적 합의가 없는 상황에서, 국세청과 같은 해석이 사회적 불평등 구조를 파악하는 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헬싱긴 사노맛을 비롯한 언론사 20여 곳은 공개적인 여론 조성에 나섰다. 자발적인 ‘집단행동’ 가운데 하나는 언론사별 온라인 납세자 명단 웹사이트(verokone)를 한 달간 닫아두기로 한 것이다. 연말에 독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시민들이 불편함을 느끼도록 만드는 데 목적을 두었다. 양대 종합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아아무레흐띠(Aamulehti) 유씨 툴렌수(Jussi Tuulensuu) 편집장은 트위터에 “(납세 정보) 투명성의 중요성을 이렇게 생각해보자. 납세 정보를 아예 공개하지 않으면 어떤 음모론들이 등장할까? 우리는 명단을 보고 핀란드 사회의 고소득자들이 세금을 잘 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라고 적었다.


핀란드에서 지난해 10만 유로 이상을 벌어들인 사람 수는 7만명가량이다. 국세청이 공개한 명단에서는 게임회사 시리어슬리(Seriously) 창업자 페트리 야르비레흐토(Petri Jarvilehto)가 450억원가량을 벌어 최고 소득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1위는 스포츠용품 회사 전 소유주 일카 브로더루스(Ilkka Brotherus)로, 850억원 소득을 올린 것으로 확인되었다. 기자들은 올해 공표된 납세자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볼 수 없었으므로, 국세청 건물에 있는 단말기나 전화 서비스로 정보를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이런 추세라면 점점 더 많은 고소득자가 납세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삭제하려 들 것이라는 게 핀란드 언론들의 비판이다.


소득과 납세 정보는 개인 정보이므로 비공개를 허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시각도 있다. 다만 핀란드 언론인들이 지적한 대로, 이 정보를 통해 핀란드 사회는 어떤 산업계에 자본이 몰리고 또 누가 어떤 소득을 올렸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경기 불황 속 게임 업계의 현황이 좋은 예다. 공평하고 투명한 과세와 납세는 북유럽식 복지제도를 떠받치는 토대다. 국가가 석박사 과정까지 무료로 공부할 수 있는 교육과 보육, 실업수당과 고용지원 제도, 수준 높은 공공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배경이다.


한국 언론은 납세자 명단은 둘째 치고, 고액체납자 문제만이라도 분노하며 다루면 어떨까. 2019년 기준 고액 상습체납자가 내지 않은 국세가 51조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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