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사법부는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의 미국 송환을 불허하며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얄팍한 이해도를 드러냈다. 같은 날 근조 화환이 도열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모친상 빈소에선, 성범죄로 복역 중인 그를 ‘민주투사’에 빗대는 어느 정치인의 몰지각한 발언이 튀어나왔다.
지난 10일 새벽엔 박원순 서울시장이 성추행 피소를 인지한 뒤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성희롱을 처음 법의 테두리 안으로 끌고 온 이의 삶이 누구도 상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마무리된 것이다. ‘인간적인 사과’를 원했다던 피해자의 존재는, 그의 마지막 길에서 지워져버렸다.
이런 일들이 숨 돌릴 새조차 없이 발생하면, 보도하는 입장에서도 잔뜩 날이 설 수밖에 없다. 혹자는 여성 기자의 ‘성인지 감수성’이 남성에 견줘 절로 타고나는 것 마냥 생각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성폭력과 성차별을 온몸으로 감지하는 감각의 촉수는 분명 남성보다 더 많겠으나, 이를 공적인 언어로 옮기는 일은 부단한 훈련이 뒤따라야만 하기 때문이다. 단어를 잘못 택한 건 아닌지, 맥락을 오독할 여지는 없는지, 사진이 또 다른 피해를 야기할 가능성은 없는지 스스로에게 수십 번씩 되물어도 늘 자신은 없다. 특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성범죄를 다룰 땐 더욱 그렇다.
손정우의 재판이 진행될 때, 이 날선 오지랖이 발동해 타사 후배를 나무란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가 재판정에서 눈물을 쏟으며 호소했다는 제목으로, 손씨와 변호인의 주장, 그 가족의 눈물만을 담아 작성한 기사를 보고서다. 나는 그에게 “가해자에게 감정 이입하지 말라”며 쏘아붙였다.
이 오지랖은 얼마 안 가 부끄러움으로 되돌아왔다. 지난 13일자 한겨레에 실린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의 칼럼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오랜 벗” 박 시장을 절절하게 추모하고,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인물”이라며 기렸다. 권수현 여성학자는 이를 두고 “교육환경에 대한 보호책임이 있는 교육감이, 학교에서 우월적 지위에 있는 교장·교감·교사가 성희롱을 하면 그들의 편에 설 수 있다는 메시지”이며 “한겨레는 그 글에 지면을 할당함으로써 이 거대한 폭력에 가담했다”고 비판했다. 나는 독자들로부터 “어떻게 그런 글이 실릴 수 있냐”는 항의도 함께 받았다.
한겨레 구성원 중 한 명으로서 이 칼럼이 게재된 점에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함께 느낀다. 사후에나마 칼럼과 관련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전에 이를 방지하거나 더 적극적인 후속조치를 요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를 곱씹는다. 촉수를 더 예민하게 세우지 못했던 점도 반성한다. 이것이 한겨레를 대표하는 의견이 될 순 없겠으나,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한 점을 나는 이 지면을 빌려 사과드린다.
언론의 책무는 ‘옳고 그름’의 경계를 ‘네 편, 내 편’의 잣대로 휘젓지 않는 것이다. 권력을 보위하지 않고 대신 약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견해의 차이’와 ‘문제의 시비’를 구분하는 것이다. ‘현재’를 제대로 기록하기 위해 우리는 훨씬 더 많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는 걸, 올여름 나는 다시금 절감했다.
박다해 한겨레신문 사회정책팀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Copyright @2004 한국기자협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