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 낀' NHK

[글로벌 리포트 | 일본]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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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시청자 입장에서 일본 공영방송 NHK는 재미가 없다. 화면은 정적이고, 내용은 기계 중립적이며, 아나운서 멘트는 차분하다. 뉴스와 다큐는 기본이고, 드라마, 버라이어티, 쇼 프로 등도 마찬가지다. 다른 민영방송과 비교하면 차이는 더 확연하다. 그런 NHK 화면이 ‘광란의 무대’로 바뀌는 시기가 있다. 선거철이다.


지난 5일 일본의 수도, 도쿄도지사 선거가 있었다. 역대 최다인 후보자 22명이 난립했다.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 선거에 나설 바보는 없다’지만, 열풍도 역풍도 없었다. 고이케 유리코 현 지사가 득표율 59.7%로 압승했다. 대항마를 자처한 나머지 후보들은 결과적으로 ‘포말 후보’(泡沫候補)가 됐다. 우리말로 치면 ‘거품 후보’쯤 된다.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그래서 ‘포말’처럼 금세 사라질 후보라는 뜻이다.


물론 ‘포말 후보’라고 볕 들 날 없으리란 법은 없다. ‘NHK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당’(N국당)이 대표적이다. 공약은 딱 한 개다. 수신료 받는 NHK가 사라지면 당도 해산하겠다는 거다. 복지, 노동, 외교 등 다른 국정 구호는 전혀 없다. 지난해 7월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NHK를 때려 부수자”는 단 하나의 캐치프레이즈로 비례대표 1석을 얻었다. 창당 6년 만의 성과였다.


‘N국당’의 다치바나 대표는 여세를 몰아 도쿄도지사 선거에도 나섰다. 도쿄올림픽이나 코로나19 등 현안은 애초 안중에 없었다. NHK 정견방송 내내 “NHK를 때려 부수자”며 게거품을 물었다. “스튜디오에 있는 NHK 직원 여러분도 다 같이 ‘NHK를 때려 부수자!’…할 리가 없겠죠?”라며 낄낄댔다. NHK로선 굴욕이었다. 그는 4만3000여표를 얻어 후보자 22명 가운데 6등을 했다. ‘포말 후보’ 가운데 압권은 ‘트랜스휴머니스트당’의 고토 테루키(37) 후보였다. 그는 정견방송 도중 ‘○○(남성의 성기를 뜻하는 비속어) 주의’라고 적힌 셔츠와 바지를 벗어 던졌다. 알몸 상태에서 기저귀를 얼굴에 뒤집어썼다. 책상에 올라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드러눕기도 했다. 고토는 자신의 기행을 이른바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싸움으로 포장했다.


가족 시청자들이 TV 앞에 모이는 밤 10시 반, NHK는 불쾌감을 주는 화면으로 가득했다. 특히 고토가 소품으로 쓴 종이 기저귀에는 오물이 묻어 있었다. ‘어른의 기저귀’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다. 고령, 질병, 장애와 관련된다. 당사자나 가족 모두에게 슬프고 괴로운 경험이다. 약자의 존엄성마저 희화화한 고토를 유권자 2만2000명(8위)이 지지했다.


일본 공직선거법은 ‘NHK 및 기간방송 사업자는 정견을 그대로 방송해야 한다’고 규정한다. 다만 ‘타인 또는 다른 정치단체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선량한 풍속을 해하거나 광고·영업 등의 언동을 해선 안 된다’고 제한한다. NHK는 정견방송을 녹화·녹음해 내보냈다. 그러나 단 한 곳도 발언을 묵음 처리하거나 모자이크를 씌우지 않았다.


‘포말 후보’에게 어느덧 NHK는 ‘명성 획득’을 위한 좋은 마케팅 수단이 됐다. 이들 대부분은 30대에, 개인 유튜브 채널을 갖고 있다. 공탁금 300만엔(3300여만원)을 내면 6분짜리 정견방송을 NHK에서 2차례, 민영방송에서도 1차례 내보낼 수 있다. 한 후보자는 “NHK 정견방송은 유튜브로 서비스돼 싸게 잡아도 1억엔의 광고 효과가 있다”고 털어놨다. 유튜브로 번 돈으로 공탁금을 내고, 다시 NHK 연설을 통해 유튜브로 유인하는 모델이다. 실제 고토의 정견방송은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590만 번(7월27일 현재) 조회됐다. 고이케 지사의 경우 고작 5만 안팎이다. 일본 누리꾼들은 고토를 놀이로 삼았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현실은 SNS가 고토의 놀이터가 됐다.


‘포말 후보’가 많을수록 정치 냉소주의는 심해지고, 현직은 더 쉽게 승리한다는 걸 이번 선거는 보여줬다. 하지만 일그러진 결과물에 대한 자성론은 찾기 어렵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총기 테러범을 두고, 그를 호명하지 말고 ‘이름 없는’(nameless)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거품’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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