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결빙은 어쩌다 '블랙아이스'로 개명됐나

출처불명 외래어 놓고 갑론을박
"공포마케팅… '살얼음'이 낫다"
"블랙아이스 표현, 경각심 높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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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 들어 언론에 부쩍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바로 ‘블랙 아이스’(black ice)다. 주로 교통사고 관련 보도에서 자주 사용되는데, 최근 설 명절을 앞두고 블랙아이스 주의를 당부하는 언론 보도도 많아지고 있다.


블랙아이스는 사전적 의미로 ‘도로 표면에 생긴 얇은 층의 얼음’을 뜻한다. 일반적인 눈길이나 빙판길과 다르게 식별이 어렵고, 비가 내리는 날씨에도 순식간에 형성될 수 있어 대형사고를 부르는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런데 이토록 위험한 블랙아이스가 왜 이제야 알려지게 된 걸까. 뉴스 데이터 분석 시스템 빅카인즈로 검색한 결과 언론 보도에서 블랙아이스란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2012년부터로 확인됐다. 하지만 전체 보도 건수는 2018년까지도 1년에 100건을 거의 넘지 않았다. 지난해 말이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2012년 1월부터 8년간 빅카인즈에서 블랙아이스로 검색된 기사는 총 1052건인데, 지난해 12월 한달 동안 쏟아진 기사는 그 절반에 가까운 417건에 달했다.


발단은 지난해 11월15일 광주-원주간 고속도로에서 발생한 연쇄 추돌사고였다. 당시 사고 소식을 보도한 곳은 KBS와 MBC뿐이었다. 그런데 사고 당시 아찔했던 순간을 보여주는 차량 블랙박스 영상이 ‘블랙아이스의 위험성’이란 제목으로 유튜브에 올라오면서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언론도 다시 이 사고를 주목했다. 언론은 “공포의 블랙아이스”, “재난영화 방불케 한 현장” 같은 제목으로 이 블랙박스 영상을 보도했다. 그달 29일과 30일 이틀간 쏟아진 관련 보도는 30건이 넘었다.


그리고 지난달 14일 상주-영천간 고속도로에서 7명의 사망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낸 연쇄 추돌사고가 발생하면서 블랙아이스 보도는 정점에 달했다. 지난 6일 경남 합천에서 발생한 40여중 추돌사고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사고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언론은 제목에서 “또 블랙아이스”, “블랙아이스 사고”라고 거의 단정적으로 보도했다.


언론 보도가 급증하자 생소한 외래어 대신 ‘살얼음’ 같은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페이스북에 여러 차례 글을 써 “시민의 언어를 언론이 수용하는 것은 좋으나, 언론이 ‘괴래어’를 먼저 만들어 언어를 끌고 가지는 말자”고 주장했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도 지난 10일 한국일보에 쓴 ‘우렁쉥이와 블랙아이스’란 글에서 “대다수가 아는 ‘살얼음’을 두고 ‘블랙아이스’라는 말을 쓰면 내용의 전문성이 올라가는 것인지 묻고 싶다”고 꼬집었다.



반론도 있다. ‘빙판길’ 같은 익숙한 표현 대신 블랙아이스라고 하는 것이 경각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는 주장이다. 지난 2013년 기상청 제안경진대회에서 한상은 당시 기상주사는 “어는 비, 노면결빙, 빙판길 등의 용어 대신에 ‘블랙아이스’를 사용할 경우 용어에서 비추어지는 강한 의미에 의해 국민의 위험 기상 상황 인식 증가가 기대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블랙아이스란 표현이 지나치게 오남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고 원인이 명확히 규명되지 않은 경우나 일반적으로 겨울철에 많은 ‘결빙에 의한 미끄러짐 사고’까지 대다수 언론은 ‘블랙아이스 사고’로 보도한다. “도로 위 암살자”, “겨울 도로의 사신(死神)” 등 공포감을 극대화하는 자극적인 표현이 자주 사용되는 것도 문제다. 여기에는 정부 관계부처의 부추김도 한몫했다. 국립국어원은 앞서 지난 2014년 이미 블랙아이스를 ‘(노면)살얼음’으로 다듬을 것을 제안했으나, 경찰청은 지난 2012년부터 블랙아이스란 표현을 고수 중이고, 소방청 역시 “도로 위 저승사자” 같은 표현을 써가며 블랙아이스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국무회의에서 두 차례나 블랙아이스 대책을 주문하기도 했다.


이정훈 KBS 기상전문기자는 지난 8일 〈‘블랙 아이스’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는 비’의 위험〉이란 기사에서 “전문가들은 블랙 아이스라는 피상적인(그것도 외래어인) 단어로 빙판길 사고의 원인을 한정 짓는데 우려를 제기한다. 그 속에 숨은 원인이 감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했다.


김고은 기자 nowar@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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