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지수 176위의 나라

[글로벌 리포트 | 베트남]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베트남에서 지내며 여러 대목에서 놀라고 있지만, 외신기자로 살면서 접하는 이곳 현지 기자들에게도 적지 않게 놀란다. 여러 가지 있지만 우선 취재경쟁을 찾아보기 힘들다. 사회주의 영향도 있겠거니 하지만 다른 분야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언론계의 ‘무경쟁’은 유독 심하다.


지난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당시 현지 공항 등지에서 촬영한, 눈에 띄는 단독 사진ㆍ동영상 기사들이 나왔지만, 특정 사안에 대한 보도는 대부분 비슷하다. 당국이 발표하는 내용을 주로 싣는다. 북미 간 회담이긴 했지만, 베트남 기자들은 자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외국에서 온 기자들이 쓴 기사를 인용해 썼다. 일반 사건 사고에서도 당국의 조사에 앞서 취재해 기사화 하는 경우는 보기 힘들다. 국경없는기자회(RSF)가 발표한 ‘2019 세계 언론자유지수’에서 베트남은 조사 대상 180개국 중 176위. 중국(177위), 북한(179위)과 비슷한 수준이다. 베트남 종이 매체는 1000개에 육박하고 지상파를 포함한 채널은 100개에 근접하며, 인터넷 매체는 이 둘을 합한 것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낮은 순위 배경에는 검열이 있다. 관영, 민영 언론사는 개별적으로 운영되지만, 모든 기사는 보도 전 상부에서 파견된 검열관의 ‘데스킹’을 거친다.


경제성장이 지상과제인 국가들이 경계하는 것 중 하나가 한 사안을 놓고 여론이 분열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베트남에서 언론은 국가 통치의 수단, 도구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한다. 지침에 어긋나게 기사를 썼다가는 정직이나 해고를 당한다. 이런 일이 적지 않다 보니 언론사도 해당 기자를 정직, 해고하더라도 중한 경우가 아니면 가명으로 계속 일을 하도록 한다. 베트남 기자들의 낮은 취재경쟁은 결국,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없는 현실이 반영된 측면이 있다.


최근 ‘언론자유지수 176위’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국가 권력서열 1위인 응우옌 푸 쫑 당서기장 겸 국가주석이 지난달 14일 남부지역 순시 중 갑자기 쓰러진 일이다. 해당 사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퍼졌지만 베트남 언론들이 보도를 ‘자제’하면서 무엇 때문에 쓰러졌는지, 지금 상태는 어떤지에 대한 궁금증에는 충분하게 답하지 못했다. 평소 이것저것 이야기 하던 기자들도 이 주제만큼은 그냥 웃거나 화제를 돌렸고, 입을 굳게 닫았다.


정부(외교부) 대변인이 내외신 기자들을 상대로 격주 목요일 오후에 갖는 기자회견장에서도 현지 관ㆍ언의 주종관계는 그대로 드러났다. 쫑 서기장이 쓰러진 지 11일만인 지난달 25일 기자회견장에는 평소보다 많은 기자들이 몰렸다. 모두발언에 기대했던 내용이 담기지 않자 쫑 서기장의 근황을 묻는 질문이 나왔고, 대변인은 짧게 답했다. “곧 일상 업무에 복귀할 것이다.” 현지 기자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 외신기자가 구체적인 복귀시기를 묻자 대변인은 “충분한 답을 했다”며 면박을 줬다.


건강 이상설에 휩싸였던 쫑 서기장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사태 한달 만인 지난 14일. 모든 신문이 회의를 주재하는 그의 모습을 1면 톱 기사로 내보냈다. 공개된 동영상 뉴스에서는 왼손을 거의 쓰지 못하는 등 불안한 모습이 노출됐고, 쫑 서기장의 몸이 자동차 안전띠와 같은 벨트로 의자에 묶인 사진과 함께 벨트가 ‘포토샵’ 등으로 삭제된 사진이 나돌면서, 그의 건강 이상설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와중에도 한 기자는 벨트를 차고 있는 사진이 “가짜 사진”이라고 했을 정도다.


베트남은 2021년 전당대회까지 지금의 권력체계를 끌고 가야 한다. 부패와의 전쟁을 벌이며 정적들을 쳐내고 있는 쫑 서기장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베트남의 ‘트레이드 마크’와도 같은 정치안정은 훼손이 불가피하다. 이 경우 베트남 경제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외국인직접투자(FDI) 급감도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내년에 맡게 될 동남아국가연합(ASEAN) 의장국 역할도 잘 해내야 전당대회도 잘 치를 수 있다. 언론자유지수 순위 상승을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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