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시간 만에 수천명 피난 행렬, 믿기 어려운 아비규환 그 자체"

[강원 기자들의 산불 재난 취재기] 권태명 강원일보 영동총지사 기자

권태명 강원일보 영동총지사 기자.

▲권태명 강원일보 영동총지사 기자.

지난 4일 밤은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처음 인제에서 산불이 발발한 데 이어, 어둠이 내려앉자 고성군 미시령 아래 도로변에서 또 다른 산불이 시작됐다.


양간지풍(襄杆之風:봄철 양양과 간성 일대에 부는 고온건조하고 강한 바람)을 등에 업은 거센 바람과 함께 속초 도심까지 번졌고, 강릉 옥계에서도 불이 나 동해 망상까지 무려 5개 시군 지역을 화마가 휩쓸었다. 불과 15시간여 만에 주민 수천 명이 피난길에 나서야 했으니, 현장은 이미 전쟁터였다.


서둘러 카메라와 장비를 챙기고 강릉에서 속초로 진입했다. 미시령 중턱에서 바라본 속초 하늘은 도깨비불처럼 날아다니는 불씨들로 뒤덮여, 화면 전체가 타오르는 붉은 색으로 채워졌다. 사방 거센 바람과 불길에 나무 타들어 가는 소리, 소방차들의 사이렌 소리가 뒤섞였고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거센 불길 속에서 여기저기 타들어 가는 주택이나 창고는 규모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휴대전화에 울린 ‘대피’ 문자에 마음만 조급해질 뿐 어디서부터 취재를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던 사이 아파트와 1㎞가량 떨어진 곳에 도시가스 공급업체와 액화석유(LP)가스 충전소 인근까지 불길이 위협하는 상황이 됐다. 자칫 대형 폭발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 소방차와 소방대원들이 필사적인 진화 작업을 펼치고 있었다. 도저히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재난영화 속 그 장면이었다.


현장 취재를 마치고 산불을 피해 주민들이 대피한 임시 대피소를 찾았다. 고성과 속초 각 마을과 아파트단지 인근까지 번진 불길에 대피한 주민들의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우자 진화작업은 재개됐고, 동이 트며 드러난 마을 모습은 처참했다. 시커먼 재가 된 현장에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주민의 통곡과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매년 3~4월 태백산맥에서 나타나는 국지적인 기후 현상인 ‘푄현상’과 ‘양간지풍’은 동해안의 대형 산불의 주원인으로 꼽힌다. 이 때문에 동해안 시군마다 ‘산불 조심’이란 붉은색 깃발을 곳곳에 설치하고 있다.


최근에는 동해안 산불관리센터도 가동해 ‘산불과의 전쟁’을 펼쳤지만, 초대형 산불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필자의 고향이기도 한 동해안은 2000년 고성 산불과 2005년 양양 산불을 비롯해 2017년 강릉·삼척 산불 등 크고 작은 산불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산불은 규모면에서 엄청났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해마다 반복되는 산불이 ‘안전불감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크다. 대형 산불을 막는 구체적인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


다시 찾은 동해안 마을, 산불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는 주민들의 재기 움직임이 분주하다. 또 이들을 도우려는 자원봉사자들, 국민적 관심과 도움의 손길도 이어지는 점은 감사한 대목이다.


이번 산불 취재를 하며 내 생명까지 위협받았다. 하지만 동해안이 다시 푸르름을 되찾을 때까지 기자정신을 간직하며 현장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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