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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항서 감독과 ‘스포츠 한류’

[글로벌 리포트 | 베트남]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2019.01.09 14:32:31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동남아에서 한류가 뜨거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베트남을 비롯한 일부 국가에서 한류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다. 한류 붐이 절정이던 2010년 전후, 베트남 공영TV의 한 토론회에 나온 출연자들은 ‘문화 습격’, ‘문화 침략’이라고 했을 정도다. 현재 이런 과격한 분위기는 줄었지만 베트남 취재원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는 반복해서 듣고 있다. 한류는 일방적이라는 이야기,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수준에서 그친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실제 이 같은 분위기는 한국일보가 베트남 국민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베트남 국민 인식조사’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무엇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느냐는 질문에 ‘한국으로 결혼이주한 베트남 여성 학대’(610명·복수응답), ‘베트남 근로자에 대한 열악한 처우’(404명), ‘급한 성격’(348명), ‘K팝 아이돌 문화’(323명) 순이었다. 조사가 진행된 시점은 2017년 12월로 박항서 감독이 인기를 끌기 직전이다.


베트남에서 2018년은 ‘축구의 해’라고 과언이 아니다. 1월 중국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U-23) 챔피언십 ‘준우승’을 시작으로, 8월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는 처음으로 ‘4강’에 진입, 베트남 축구사를 새로 썼고 2018년 아세안축구연맹(AFF) 스즈키컵 우승컵을 들어 올리면서 연말을 뜨겁게 달궜다. 축구 하나로 인구 1억의 온 나라가 들썩인 지난 한 해, 베트남은 축구 이야기로 시작해서 축구 이야기로 끝났다는 말이 과하지 않다.


2017년 10월, 베트남 언론들이 새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으로 한국의 박항서 감독이 선임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그게 누군데?”라는 댓글에서부터 “베트남 축구협회가 한국인 관광객 유치전에 나섰다”는 식의 비아냥이 주를 이뤘다. 1년여가 지난 지금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축구 덕분에 행복한 해였다’고 입을 모은다. 해가 바뀌고, AFF 우승컵을 거머쥔 그날로부터 한 달이 다 돼 가지만 그날의 감동은 여전하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엄지를 들어 보이고, 이야기 중에 박 감독 내용은 빠지지 않는다.


박 감독의 인기 수준을 엿볼 수 있었던 장면 하나. 지난달 15일 결승전이 열린 하노이 미딘 경기장 인근에서는 박 감독의 얼굴 그림이 호찌민 전 주석과 보 응우옌 지압 장군의 초상화와 나란히 진열돼 판매됐다. 국부(國父)로 칭송되는 호찌민 전 주석, 1954년 프랑스와 벌인 항불(抗佛) 디엔비엔푸 전투와 항미(抗美) 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압 장군과 같은 ‘선상’에 선 셈이다. ‘오버액션’이라는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게 그림이 팔리고 있다는 것은, 그날만큼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박 감독은 역사 속 그 두 영웅과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다.


베트남에서 외국인이 ‘영웅’으로 일컬어진 예는 2008년 처음으로 베트남에 AFF 우승컵을 안긴 포르투갈 출신의 엔리끄 칼리스토 감독이 있지만, 박 감독 수준까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베트남 학계에서는 박 감독이 베트남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비결, 박 감독을 통한 한-베 양국 관계 변화 등이 연구주제가 될 정도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한류 연구자들이 그 범위를 스포츠로 확장한 것이다. 축구에서 확인된 ‘스포츠 한류’는 TV드라마와 K팝의 효과를 능가하면서도 거부감 없는 한류라는 평가를 받는다.


베트남에서는 축구뿐만 아니라 사격, 태권도, 골프, 양궁 등 7개 분야에서 한국 지도자들이 뛰고 있다. 한국의 경우 대부분 종목이 기업 후원을 받고 있지만 베트남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연습탄이 제때 공급이 안돼 사격 훈련에 차질이 생길 정도라고 한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베트남에 올림픽 사상 첫 금메달을 안긴 사격이 이렇다면 다른 종목 사정은 불 보듯 뻔하다. 1년 사이 박항서 감독이란 큰 변수가 반영된 지금, 같은 내용으로 설문조사를 한다면 다른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부작용 없는 한류로 그들을 돕고, 우리 스스로를 세우는 해가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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