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 카메라 장비를 챙겨 포항으로 향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해가 저물 무렵 도착한 포항의 이주노동자센터에서 화상으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피로르스 씨를 만났다. 화상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가슴에 안고 있었고, 눈에 맺힌 눈물 너머에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심리치료는 받은 적 없었다. 한국어가 서툰 그가 모국어인 크메르어로 심정을 토로할 수 있는 대상은 심리치료사가 아닌 고향에 있는 가족뿐이었지만, 본인보다 힘들어 할 어머니를 생각하며 사고 사실을 숨겼다.
27만여 명의 이주노동자 사이에는 제2, 제3의 피로르스가 수없이 많았지만, 세월호 참사와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메르스, 최순실 국정농단 등 급박하게 돌아가는 일정으로 화상 산재 피해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는 간헐적으로 이뤄졌다. 보도 역시 오랫동안 미뤄졌다.
4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김성진 포항이주노동자센터장은 늘 같은 자리에서 화상 피해 이주노동자들을 돌보며, 그중에 알게 된 피해자들의 사연을 기자에게 소상히 전했다. 김 센터장의 도움으로 경남 통영에서 폰록 씨를, 스리랑카파나두라에서 딜란타 씨를 추가로 만날 수 있었다. 화상을 입은 이들의 눈과 코는 문드러져 있었고 귀는 모두 타들어 가 흔적만 남아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충격이었지만, 더 큰 문제는 화상 산재 피해 이주노동자 대부분이 산업재해보상보험법 허점으로 법 이름에 명시된 ‘보상’과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데에 있었다. 화상 산재의 경우 대체로 치료 과정에서 비급여비중이 높아 많은 피해자가 비용 부담으로 복원 성형 수술을 포기했다. 또 한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은 언어적인 문제로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따른 보상신청과 처리 과정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참혹한 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에 대한 보도로 상을 받게 돼 마음이 무겁다. 앞으로도 이주노동자의 더 나은 일자리 환경과 그들의 권리를 위해 더 열심히 듣고 찍고 쓰는 기자가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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