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부역언론인 처벌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

[언론 다시보기] 진민정 저널리즘학연구소 연구이사

▲진민정 저널리즘학연구소 연구이사

프랑스의 부역언론인 처벌은 특별히 엄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치 점령기에 신문을 발행했거나 특히 독일정부의 보조금을 받아 히틀러 전체주의의 앵무새 역할을 담당했던 많은 언론사들이 폐간되었고, 소속 언론인들은 가혹한 숙청의 대상이었다.


라디오 파리 방송국도 그 사례 중 하나다. 선전선동의 도구로서 라디오의 잠재력을 알고 있었던 나치 세력은 파리에 입성하자마자 국영방송국인 라디오 파리를 장악했다. 다른 방송국들은 모두 방송을 중지하거나 문을 닫은 상태였다. 라디오 파리는 나치선전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5개의 채널을 가질 정도로 막강한 나치의 선전매체로 자리 잡았다.


당시 라디오 파리를 채운 것은 극우 성향의 인사들이었다. 1942년 라디오 파리 방송책임자로 임명된 장 에롤-파키, 그리고 극우 정치인이면서 라디오 파리의 논설위원으로 하루에 두 번 시사매거진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필립 앙리오가 대표적이다. 물론 이들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져야 했다. 해방 후 독일로 피신해 프랑스 망명정부에서 라디오 파리 방송을 이어갔던 장 에롤-파키는 부역자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45년 10월11일 샤티옹 감옥에서 총살당했고, ‘황금 목소리’라는 별명으로 나치 점령시대 최고의 선동가 중 하나로 꼽히는 필립 앙리오는 해방 전인 1944년 6월21일 레지스탕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필립 앙리오의 죽음은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가 라디오에서 “히틀러를 위해 죽고, 프랑스인에 의해 총살당한다”라는 표현을 한 적이 있는데 그 후 45일 만에 총살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나치 점령기에 선전선동 매체로 봉사한 언론뿐 아니라 전쟁 전의 부패언론도 청산의 대상이었다. 새로운 사회 건설에 적합한 도덕적인 언론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전쟁 전의 부패언론도 청소해야 한다는 것이 드골과 저항세력 생각이었다. 반역자들을 숙청해 치욕적인 과거를 청산하는 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던 것이다. 전쟁 전에 발행되던 신문들 중 해방 이후에도 폐간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르 피가로, 라 크롸, 르 마탱 등 단 세 곳뿐이었다.


당시 부역 언론인에 대한 가혹한 처벌은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다. 언론인들이 속죄양이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전후 처리의 지침과 같은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저항신문, 콩바의 편집국장 알베르 까뮈는 1945년 8월30일 사설에서, 재판과정에 정치적 영향력이 개입해 마치 강제노역은 대수롭지 않은 처벌인 듯 많은 이들이 사형을 외쳐대고 있다면서 ‘프랑스의 숙청작업은 실패다’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자신이 주장한 엄정한 숙청작업과는 거리가 먼 숙청작업의 양상에 실망을 피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역언론의 전면적인 폐간 조치와 부역언론인의 처벌, 그리고 레지스탕스 언론의 부상은 프랑스 민주주의가 한발 더 나아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많다. 이러한 극단의 조치 이후 프랑스 언론계는 새 면모를 갖추었고, 민주적으로 재편성되었기 때문이다.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한 공영방송을 구하기 위해 수많은 언론인들이 몸부림을 치는 이 시기에 새삼스럽게 70년이 훌쩍 지난 프랑스의 부역언론인 숙청 작업을 돌아본다.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의 우리가 배울 것이 있을 거라 여기기 때문이다. 언론 적폐 청산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 와중에 많은 논란도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기레기’, ‘정권의 나팔수’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새 시대의 언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아프더라도 곪은 상처를 도려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래야만 새살이 돋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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