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은 1950년대 말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과 자유로운 토론을 허용하는 ‘백화제방·백가쟁명’을 설파한다. 이에 신중국 성립 이후 누적된 공산당 통치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지식인들은 다양한 개혁방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파를 제거하려한 마오쩌둥의 술수에 불과했다. 결국 이어진 건 개혁이 아닌 대규모 숙청과 공산당 일당 통치의 강화뿐이었다. 문화대혁명까지 계속된 그 과정에서 단연 선두에 선 것은 홍위병이라 불린 어린 학생들이었다.
홍위병에겐 어떤 법도, 권위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오직 마오쩌둥의 지시와 가르침만이 절대적인 행동지침이었다.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 국가 주석 자리에 올랐던 류사오치와 한국전쟁에서 중국군을 이끌었던 펑더화이조차 그들을 반동으로 규정하는 홍위병의 광기에 맞설 수 없었다. 홍위병이 갖고 있던 왜곡된 권위에 대한 복종과 공산주의에 대한 교조적 맹신은 문화대혁명의 광풍 속에 중국 역사를 후퇴시키는 결과를 남겼다. 그리고 류샤오보의 죽음은 홍위병의 역사가 현대 중국에서도 대중의 입을 막고 정부에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하는 지배체제의 일환으로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홍위병에 빗대는 말들을 국내에서도 언제부턴가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최근엔 언론 개혁을 요구하는 언론인들을 홍위병으로 일컫는 말들이 쏟아지고 있다. 부당 해고와 징계를 일삼아오다 특별근로감독 대상이 된 MBC 경영진이 노동조합을 정치권력의 홍위병으로 지칭하는 식이다. 하지만 국민이 아닌 정권에 충성을 다하고 세월호 참사와 국정농단 사태 앞에서도 진실의 왜곡과 은폐에만 급급해 왔던 이들이 누구였는지는 지난 10여년의 행적이 증명하고 있다. 권력에 복종하고 공영방송을 사유화한 채 개인과 특정 정파의 이익만을 추구해온 이들이야 말로 홍위병 아닐까. 류샤오보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며 진짜 홍위병에 맞서 공영방송을 정상화하기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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