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로 보는 중국 정치

[글로벌 리포트 | 중국]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요즘 중국에서 이걸 보지 않고선 대화에 끼지 못한다는 드라마가 있다. ‘인민의 이름으로(人民的名義)’란 55부작 정치 드라마 얘기다. 중국 최고의 인기 채널인 후난(湖南) 위성TV와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 아이치이(愛奇藝)에서 동시 방영 중인 이 드라마는 지난달 28일 첫 전파를 탄 지 일주일만에 10억 뷰(view)를 기록하는 등 중국 대륙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사드(THAAD) 파문으로 중국에서 자취를 감춘 한류 드라마의 절정기 인기를 능가하는 기세다. 드라마 원작인 작가 저우메이썬(周梅森)의 동명소설은 벌써 동이 난지 오래다.


대박의 비결은 ‘현실’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 있다. 줄거리는 최고검찰원 반탐(反貪)총국 소속의 검사가 온갖 외압과 위험을 무릅쓰고 권력 실세의 부정부패를 성역 없이 파헤쳐 심판대에 올린다는 내용이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오히려 식상한 감이 있을 정도로 뻔한 줄거리지만 중국에선 얘기가 다르다. 전편을 사전제작한 뒤 엄격한 검열을 통과해야 방영이 되는 중국 방송계에서 ‘인민을 위해 복무(爲人民服務)’해야 할 공산당 간부나 정부 관리의 부패를 드라마로 표현하는 건 금기 중의 금기에 속한다.


중국의 안방극장에서 볼 수 있는 채널은 줄잡아 50여개에 이르지만 드라마는 현실과 동떨어진 내용의 판타지나 사극, 이도 저도 아니면 중국 혁명 영웅들의 일대기나 항일전쟁 드라마 등 선전물 일색이다. 그런 점에서 진시황 때나 청나라의 궁중 암투가 아닌,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그린 ‘인민의 이름으로’는 중국에선 대단히 이례적인 작품이다.


도배지로 가린 침실 벽 안쪽의 공간을 현찰 다발로 메운 중국 관리들의 부패상은 물론 파벌간 권력 암투, 여성이 개입된 음모와 정경 유착의 실상 등 그동안 TV에서 볼 수 없었던 ‘현실’이 이 드라마에서 생생하게 펼쳐진다. 첫회에선 부패 관리의 집을 급습한 검찰 수사관들이 벽과 침대, 냉장고에서 꺼낸 돈다발을 세던 중 계수기가 과열로 고장나는 모습이 나온다. 이는 2014년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부패 관리의 모습만 리얼한 게 아니라 드라마 속 가상의 지방 정부에서 펼쳐지는 권력 암투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사법을 주무르는 ‘정법계(政法系)’와 지도자의 측근 그룹인 비서방(秘書幇)의 견제와 갈등이 이 드라마의 또다른 줄거리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관 공직자의 뇌물수수 사건을 시작으로 복잡하게 얽힌 정계 내막이 밝혀진다”는 방송사측의 선전 문구가 빈 말이 아닌 것이다. 8년간의 구상과 취재 끝에 작품을 완성했다는 원작자 저우는 집필 과정에서 친청(秦城)교도소 등에서 반부패로 갇힌 수감자들을 인터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니 드라마가 황당한 별세계의 얘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얘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곧바로 의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이런 드라마가 촘촘한 검열 장벽을 뚫고 전파를 탈 수 있었던 것일까. 해답은 제19차 중국 공산당 당 대회가 약 반 년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5년 전 18차 당대회에서 공산당의 최고지도자로 선출된 직후 5년째 부패와의 전쟁을 펼치고 있다. “호랑이(고위직)든 파리(하위직)든 부패 분자는 모두 때려잡겠다”는 일갈은 결코 엄포가 아니었다. 정의감과 사명감으로 무장한 드라마 속 검사가 비리를 파헤치고 부패를 척결하는 장면에 시청자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낄 때마다 시진핑 주석의 인기와 지지율이 올라가게 돼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의 입장에선 19차 당대회를 앞두고 시 주석의 반부패 성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기엔 서민들이 즐겨보는 드라마를 능가할 수단이 없다. 필자의 억측이 아니라 드라마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중국 관리가 이미 밝힌 바 있다.


“올해의 당면 임무는 19차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 개최, 건군 90주년, 홍콩반환 20주년 등 주요 행사 기간에 맞춰 ‘인민의 이름으로’ 등 사상성이 깊고 뛰어난 예술감각, 훌륭한 제작기술을 갖춘 수작(秀作)을 제작하는 것이다.” 중국 방송언론 정책을 총괄하는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의 마오위(毛羽) TV드라마국장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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