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슬픔 '제주 4·3'을 떠올리며

[그 기자의 '좋아요'] 권혁태 제주MBC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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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태 제주MBC 기자

제주의 4월은 찬란하다. 한라산 중턱부터 해안까지 초록으로만 표현하기에 아쉬움이 남는 경쾌한 색깔을 가진 풀들이 올라오고 그 뒤로 노란 유채꽃이 자리 잡는다. 곳곳에는 사진 찍는 무리들이 가득하고 새 봄은 그렇게 섬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그 찬란함의 밑바탕에는 제주 사람들의 슬픔이 깊이 깔려 있다. 1948년 4월3일. 제주 곳곳에 오름에서 봉화가 오르며 시작된 봉기. 그 이후에 벌어진 수많은 민간인 학살, 그 사건을 우리는 제주4·3사건이라고 부른다. 3만에 가까운 희생자 대부분이 노인과 여성, 어린이들이었다.


2000년 4·3특별법 제정 전까지, 4·3이라는 말은 이 섬에서 금기어였다. 마을에도 연좌제가 있어서 ‘산사람’이 많았던 동네는 수십 년 동안 빨갱이 동네라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내가 만난 유족 한 분은 어머니가 총살된 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동생을 살리기 위해 젖동냥을 다녔지만 중산간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폭도 새끼’로 불리며 외면받아 자신의 품에서 숨이 멎는 동생을 바라만 봐야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제주의 4월은 이처럼 어처구니가 없는 사연들이 넘쳐난다. 군경과 서북청년단은 무자비했고 유족들은 4월이 되면 4·3 평화 기념관에 마련된 봉안관에 가서 손바닥만 한 위패를 바라보며 70년 가까이 쌓여온 서러움과 한을 토해낸다. 이명박 정부 이후 계속 되어온 극우단체들의 4·3 흔들기는 유족들에게 또 한 번 깊은 상처를 남기고 있다.


제주 출신의 한 시인은 비행기를 타고 뭍 나들이에 나설 때 비행기 안에서 눈을 감고 발을 살며시 든다고 했다. 한해 1300만명이 오가는 제주공항은 4·3 당시 재판도 없이 사람을 끌고와 총살한 학살지였기 때문이다. 실제 몇 년 전에 그곳에서 400명이 넘는 시신들이 발굴되기도 했다. 시인이 비행기 안에서 발을 드는 이유는 바로 그 희생자들을 짓뭉개며 하루에도 수 백 번씩 뜨고 내리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는 미안함과 죄스러움 때문이다.


이제 곧 4월이다. 제주를 오고가는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 우리 잠시라도 발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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