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달러 지폐와 역사의 아이러니

[글로벌 리포트 | 미국]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손제민 경향신문 워싱턴특파원

미국 뉴욕주 버팔로에서 국경선인 나이아가라 폭포를 건너면 캐나다 온타리오주 세인트캐서린이란 작은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의 살렘 예배당 앞에는 한 미국인의 흉상이 서 있다. 새 미화 20달러 지폐의 주인공 해리엇 터브먼이다.


터브먼은 1820년 쯤 메릴랜드의 한 플랜테이션에서 흑인노예로 태어난 여성이다. 어린 시절 주인이 던진 쇳덩이에 머리를 맞아 크게 다쳤고 평생 발작성 간질을 앓았다. 먼 타향에 흔적을 남긴 것은 그가 이 곳으로 도망간 노예였기 때문이다. 그는 1849년 농장을 탈출해 북쪽으로 갔다. 그가 북극성에 의지해 밟아 간 윌밍턴, 필라델피아, 뉴욕, 올버니, 시라큐스, 로체스터, 버팔로, 세인트캐서린 경로는 ‘비밀철도(Underground Railroad)’로 불린다. 터브먼은 이 비밀열차의 기관사였다. 진짜 철도는 아니고 터브먼이 다른 노예들을 비밀리에 탈출시켰던 활동을 지칭한다.


터브먼이 캐나다에 도착한 것은 1851년 12월이다. 세인트캐서린은 도주 노예들의 피난처 같은 곳이었다. 그는 8년간 이 곳을 근거지로 미국 노예 100여명을 탈출시켰다. 미국에서 1850년 통과된 법으로 노예주들은 도망간 노예들을 체포하러 다닐 수 있는 권한이 생겼다. 이 때문에 터브먼 등 많은 노예들이 캐나다로 국경선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캐나다는 1793년 노예제를 폐지했다. 유엔 난민협정 채택 100년 전이었지만 이들은 난민 지위에 꼭 들어맞았다.


▲미국 재무부는 미국의 20달러 지폐 앞면 인물을 현재의 제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에서 흑인 여성 인권 운동가 해리엇 터브먼으로 변경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20달러 지폐에서 터브먼에 밀려난 인물은 1829~1837년 미국 7대 대통령을 지낸 앤드루 잭슨이다. 잭슨은 미국 역사에서 ‘잭슨주의(Jacksonian Democracy)’라는 시대 규정을 남긴 의미 있는 인물이다. 잭슨주의는 제퍼슨주의에 이어진 시기로 대략 잭슨이 대통령이 된 1828년부터 남북전쟁 시작 전까지를 가리킨다.


잭슨주의자들은 기독교적인 ‘명백한 사명(Manifest Destiny)’이라는 말로 북미 대륙을 앵글로색슨이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했고 노예제 논쟁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애팔래치아 산맥 주변에 정착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의 지지로 당선된 잭슨은 투표권의 확대는 백인들로 국한돼야 한다고 믿었다. 잭슨 본인이 대농장주 출신으로 1804년 노예 9명으로 시작해 1845년 숨질 때까지 계속 노예를 늘려 150여명을 소유했다.


그런데 20달러 인물 교체 발표 후 공화당 대선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반응이 흥미롭다. 트럼프는 한 인터뷰에서 “앤드루 잭슨은 이 나라의 엄청난 성공의 역사를 만든 인물”이라며 교체에 반대했다. 그는 굳이 터브먼을 넣어야 한다면 거의 통용되지 않는 2달러(토머스 제퍼슨이 그려져 있다)에 넣든지 새 지폐를 만들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들은 트럼프를 잭슨주의적 전통에 들어맞는 정치인으로 분류한다. <잭슨의 땅: 앤드루 잭슨 대통령, 체로키 추장 존 로스, 미국의 엄청난 토지 탈취>의 저자 스티브 인스킵에 따르면 잭슨은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하는 한이 있어도 자기 지지자들의 현안은 꼭 풀어주겠다고 약속하며 그 때까지 한 번도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끌어낸 포퓰리스트였다. 경쟁자들은 그를 다듬어지지 않고 야만적이며 때론 공화국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라고 했지만, 잭슨은 이들을 모두 격파했다. 잭슨은 인디언들을 내쫓고 땅 장사로 부자가 된 뒤 정작 부자들을 욕하며 대통령에 올랐다. 자신은 노예들을 소유하면서 자유의 가치를 강조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1806년 신문지상에서 그를 모욕했던 사람과 말다툼 끝에 총으로 쏴 죽이기도 했다.


트럼프와 잭슨의 차이는 트럼프가 총 대신 트위터와 험한 말로 무장하고 있는 점 정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노예와 인디언을 무슬림과 멕시코계 이민자로 바꾸면 잭슨은 트럼프가 된다. 터브먼은 다른 노예들을 탈출시켜준 뒤 말했다. “더이상 내 사람들을 엉클샘에게 맡기지 않겠다. 나는 그 모두를 캐나다로 데려왔다.” 터브먼이 도주노예법을 피해 캐나다로 간 지 165년만에 많은 미국인들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캐나다로 이민 가겠다고 말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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