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에 미쳐 있나

[그 기자의 '좋아요'] 최선욱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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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욱 중앙일보 기자

[책] 돈끼호떼


녹슨 투구를 꺼내 닦고, 떨어져 나간 턱 가리개는 마분지로 만들어 붙인다. 부스럼투성이 말에겐 ‘로신안떼(Rosinante)’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위험한 고난을 무릅쓰고 모든 억울한 자를 풀어주고, 세상 모든 일을 해결해 영원한 명예와 명성을 얻기 위한 필수 요소다. 그러려면 자신에게도 새로운 이름이 꼭 필요하다. ‘돈끼호떼’라는 이름까지 정하고 나니 이제 손색 없는 방랑기사다. 떠나는 길에 들른 술집 주인을 ‘성주님’이라 부르며 기사 작위식을 열어달라 간청한다. 그렇게 기사가 된 돈끼호떼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풍차에 달려들고, 마주치는 사람에게 시비를 걸다 두들겨 맞아 동네에 웃음거리가 된다. 돈끼호떼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다. 명성을 얻기 위한 시련의 과정일 뿐이니까.


4·13 총선 정국에서 각 당의 후보자가 되기 위해 뛰는 도전자들을 만날 때면, 400년 전 스페인에서 만들어진 이 가상의 인물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난해 말부터 찬바람을 맞으며 자신의 명함을 돌리던 후보들. 빨강·파랑·초록 각 소속 정당 색깔의 점퍼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을 느끼며 평생 처음 보는 정치인에게 “힘내시라”며 악수를 건낼 때마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명예를 눈앞에 두고 고난을 무릅쓰고 있는 돈끼호떼의 자부심이 묻어났다. 돈끼호떼의 ‘셀프 기사 작위식’과 후보자가 자신의 지지자들만 모아 진행한 선거사무소 개소식에 대한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막말 파문과 상호비방전으로 세상의 웃음거리가 돼도 그들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주 전국 253개 지역구의 총선 후보자가 그렇게 결정됐다. 공천을 받지 못한 사람 중 일부는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고, 또 일부는 4년 뒤를 기약하며 더 기나긴 방랑길을 떠났다. 모두 돈끼호떼가 걸은 시련의 길이다.


1600쪽에 이르는 무모한 도전기를 마친 돈끼호떼는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일이 얼마나 실현 불가능했었는지를 깨닫고 눈을 감는다. 그의 이웃은 ‘미쳐서 살고, 정신 들어 죽다’라는 문장을 묘비명에 써준다. 그들도 정치에 미쳐 있기에, 그렇게 의지 넘친 눈빛으로 살아 있는 것 같다. 정치인의 세속적인 권력 다툼을 손가락질 하며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나는 무엇에 미쳐있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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