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뭉치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

[글로벌 리포트 | 중국]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베이징 특파원으로 일하는 필자는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를 비롯, 예닐곱 가지의 중국 신문을 구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 읽기에 들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신문은 달라도 실리는 기사는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국 신문들은 매일 매일 공산당 중앙선전부가 내려보내는 지침에 따라 편집하는 까닭에 신문별로 지면에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특히 기자가 관심을 갖는 중국 지도자들의 동향이나 발언 등 정치 기사는 글자 한 자 차이없이 똑같다. 자사 기자가 취재해 쓴 기사를 싣는 게 아니라 신화통신의 기사를 그대로 전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를 ‘통가오(通稿)’라 부른다. 공통원고란 뜻이다.


필자가 가장 정성들여 읽는 신문은 광저우(廣州)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남방도시보(南方都市報)’와 매주 목요일에 나오는 ‘남방주말(南方週末)’이다. 이 신문은 가끔 ‘사고’를 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최근에도 ‘한 건’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2월20일자 중국신문은 약속이나 한 듯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인민일보와 신화통신, CCTV 등 3대 관영 언론사를 방문해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는 내용의 기사를 1면 톱으로 썼다. 물론 기사 본문은 통가오였다.


▲사진1

남방도시보도 1면 머리에 굵은 활자로 두줄짜리 제목을 배치하고 시 주석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배치했다.(사진1 왼쪽) 하지만 이 신문의 선전판은 달랐다. 1면 머리의 제목은 광저우판과 같았는데 사진을 시 주석의 언론사 방문 장면이 아닌 엉뚱한 것으로 골랐다.(사진1 오른쪽) 같은 날 장례식을 치른 공산당 원로 위안겅(遠庚)의 유골을 바다에 뿌리는 장면이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 개방 정책을 보좌한 위안겅은 선전 경제특구를 건설한 장본인이었으니 그의 장례식 사진은 선전판 1면에 실릴 정도의 기사 가치가 있었다. 어쩌면 위안겅으로 상징되는 개혁의 시대가 가고, 공산당이 언론을 장악하는 통제의 시대가 왔음을 전하려 한 편집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시 주석이 중요한 말씀을 하셨다는 제목 밑에 불경스럽게도 장례식 사진을 썼으니 공산당의 진노를 사 해당 편집간부는 해임을 당했다.


▲사진2

필자는 이 사진을 보면서 5년 전 같은 신문이 저지른 또 다른 사고를 떠올렸다. 2010년 12월12일자 남방도시보는 ‘장애인아시안게임 광저우에서 개막’이란 제목 아래에 개막식에 등장할 다섯 마리의 학 사진을 실었다.(사진2) 문제는 사진 배경에 있는 빈 의자 세 개였다. 이는 곧바로 전날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을 연상시켰다. 수상자인 중국의 반체제 운동가 류샤오보(劉曉波)가 참석을 못해 빈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사진이 ‘빈 의자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사진캡션과 함께 전 세계 언론에 실렸지만 중국 언론들은 이 사진을 실을 수 없었다.(사진3)


▲사진3

남방도시보는 정부 지침에 충실하게 장애인아시안게임 개막 소식을 보도하면서 고도의 은유로 류샤오보의 평화상 수상 소식을 전한 것이다. 사진의 주인공인 학(鶴)은 중국어로 읽으면 하(賀)와 발음이 같아 류의 수상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로도 읽혔다. 편집자의 이런 교묘한 의도는 인터넷을 타고 빠른 속도로 전파됐다.


이밖에도 남방도시보는 여러 차례의 사고 기록을 갖고 있다. 유엔이 정한 국제 민주주의 날인 지난해 9월16일에는 흑색의 통단 광고를 게재해 ‘중국의 민주주의는 암흑과 같다’는 무언의 항의를 표현한 것이란 추측이 무성했다. 필자가 기억하는 최대의 사건은 남방도시보의 자매지인 남방주말의 파업 사태다. 2013년 1월 이 신문의 기자들은 사설 개작(改作)에 항의해 파업에 돌입했다. 중국에선 있을 수 없는 사건이어서 이를 전하는 외신 기사를 보면서도 반신반의했던 기억이 새롭다.


중국에서 가장 신문다운 신문으로 남방도시보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비단 이런 몇 건의 사고 때문이 아니라 심층 취재나 탐사 보도 등 읽을 거리가 풍부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다. ‘여기서 중국을 읽는다’는 남방도시보의 홍보 카피 문구대로 필자는 남방도시보와 남방주말을 통해 오늘의 중국을 이해한다. 그러면서도 필자는 걱정이 앞선다. 최근 들어 중국 당국의 언론통제 강도가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방도시보와 남방주말의 사고는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다. 그들의 기자정신을 믿기 때문이다.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