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여행과 닮았다

[스페셜리스트 | 문화] 김빛이라 KB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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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빛이라 KBS 기자

낯선 공간은 늘 매력적이다. 익숙하지 않은 공기 속을 거닐다 몇 평 남짓의 카페에 들어가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순간의 기억은 의외로 강렬하고 또렷하게 새겨진다. 그 낯설음과 두근거림의 중간 어느지점을 오갈 무렵, 내 감정을 파고드는 ‘사람’을 마주하게 된다면 오죽할까. 엇갈리는 눈빛 속, 처음 건넨 말 한마디는 익숙했던 서울 어느 거리에서의 낯선 이들을 스칠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프랑스 남부의 한 마을로 향하던 기차 안. 프랑스어로 가득했던 공간에서 또렷한 발음으로 ‘홍상수’를 안다며 내게 말을 건 동갑내기 터키 친구와의 인연은 벌써 10년이다. 뉴욕의 게스트하우스에서 세계 각지의 여행자들과 나눴던 지극히 평범한 농담들에 추위도 잊고 웃어댔던 때도 잊지 못한다. 여행은 그저 스쳐 지나갈 것들을 인연의 순간으로 만들어주는 마법이다.


그래서 영화 ‘남과 여’가 그렇게 끌렸던걸까. 눈 덮인 핀란드에서 뜨겁게 빠져드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우연히 동행하게 된 두 사람, 눈 덮인 숲길을 헤매는 남녀. 짧은 순간 서로가 느낀 동병상련이 텅 빈 설원을 만나 폭발한다. 이름도 모른다. 서로에게 배우자와 아이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핀란드가 문제였다. 핀란드의 이국적 풍경은 이들의 환상적인 사랑에 근거를 준다. 매년 유럽 여행지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일년을 기다리는 내게도 낯선 풍광들만 떠올려지는 낯선 곳. 그들의 가정, 아이, 일… 현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순간만큼은 ‘남과 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묻는다.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온 그들은 핀란드에서의 시간을 로맨스로 묻어야 할지, ‘서울’에서도 받아들여야할지 혼란스럽다. 실제 언론 인터뷰에서 ‘가장 낯선 나라에서의 로맨스’를 그리고자 했다고 이윤기 감독은 말했다. 남과 여를 연기한 배우 공유와 전도연은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 펼쳐지는 분량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 판타지’ 같았다고 표현했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에서도 통영이 문제다. 한여름의 통영 앞바다가 펼쳐지고, 애주가 남녀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니 두근거릴수 밖에. 결혼 직전 운명의 사랑을 찾아 이탈리아 밀라노부터 피렌체까지 일주일을 헤메는 탕웨이의 ‘온리유’는 낯선 곳에서의 우연이 운명이 될 수 있는지 끝까지 관객에게 묻는다. 두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캐롤’에서도 전에 없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사랑을 발견하는 시점도 둘만의 자동차 여행이다. 기차에서 만난 남녀가 너무도 쉽게 사랑에 빠진 ‘비포선라이즈’가 나온지 벌써 20년이 됐으니, 지금도 훗날에도, 낯선 공간은 다양한 사랑 유형의 근거가 되는 매력적인 영화 소재가 될 터이다.


영화 ‘남과 여’의 남자주인공 ‘기흥’은 “그런 것도 같고, 이런 것도 같아요” 류의 대화에 익숙하다. 서울로 돌아온 기흥은 “나 참 애매하게 산다”고 자책하지만, 핀란드에서 만난 낯선 여인에게 돌진하던 순간들은 확실한 용기가 수반됐던 행위였다.


정말이지, 사랑은 여행과 퍽 닮았다. 그것이 불륜이든 무엇이든, 사랑이라 느끼는 그 감정은 익숙했던 시공간을 순식간에 낯설게 만든다. 불안하게 만든다.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냄새를 맡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들도 여행지에서는 긴장을 만들어내고 설렘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시계를 보는 것조차 잊게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고통일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 사랑도 여행도 용기를 내는 것에서 시작되고, 발전하기에, 그것이 불편한 줄 알면서 나는 오늘도 사랑과 여행에 설레고, 계속해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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