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영화 ‘남과 여’가 그렇게 끌렸던걸까. 눈 덮인 핀란드에서 뜨겁게 빠져드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우연히 동행하게 된 두 사람, 눈 덮인 숲길을 헤매는 남녀. 짧은 순간 서로가 느낀 동병상련이 텅 빈 설원을 만나 폭발한다. 이름도 모른다. 서로에게 배우자와 아이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핀란드가 문제였다. 핀란드의 이국적 풍경은 이들의 환상적인 사랑에 근거를 준다. 매년 유럽 여행지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일년을 기다리는 내게도 낯선 풍광들만 떠올려지는 낯선 곳. 그들의 가정, 아이, 일… 현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 순간만큼은 ‘남과 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묻는다. ‘서울’의 일상으로 돌아온 그들은 핀란드에서의 시간을 로맨스로 묻어야 할지, ‘서울’에서도 받아들여야할지 혼란스럽다. 실제 언론 인터뷰에서 ‘가장 낯선 나라에서의 로맨스’를 그리고자 했다고 이윤기 감독은 말했다. 남과 여를 연기한 배우 공유와 전도연은 핀란드와 에스토니아에서 펼쳐지는 분량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 판타지’ 같았다고 표현했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에서도 통영이 문제다. 한여름의 통영 앞바다가 펼쳐지고, 애주가 남녀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니 두근거릴수 밖에. 결혼 직전 운명의 사랑을 찾아 이탈리아 밀라노부터 피렌체까지 일주일을 헤메는 탕웨이의 ‘온리유’는 낯선 곳에서의 우연이 운명이 될 수 있는지 끝까지 관객에게 묻는다. 두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영화 ‘캐롤’에서도 전에 없던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사랑을 발견하는 시점도 둘만의 자동차 여행이다. 기차에서 만난 남녀가 너무도 쉽게 사랑에 빠진 ‘비포선라이즈’가 나온지 벌써 20년이 됐으니, 지금도 훗날에도, 낯선 공간은 다양한 사랑 유형의 근거가 되는 매력적인 영화 소재가 될 터이다.
영화 ‘남과 여’의 남자주인공 ‘기흥’은 “그런 것도 같고, 이런 것도 같아요” 류의 대화에 익숙하다. 서울로 돌아온 기흥은 “나 참 애매하게 산다”고 자책하지만, 핀란드에서 만난 낯선 여인에게 돌진하던 순간들은 확실한 용기가 수반됐던 행위였다.
정말이지, 사랑은 여행과 퍽 닮았다. 그것이 불륜이든 무엇이든, 사랑이라 느끼는 그 감정은 익숙했던 시공간을 순식간에 낯설게 만든다. 불안하게 만든다.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냄새를 맡는 지극히 평범한 행위들도 여행지에서는 긴장을 만들어내고 설렘을 동반한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하는 시간은 시계를 보는 것조차 잊게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한없이 고통일 때도 있다. 하지만 결국 사랑도 여행도 용기를 내는 것에서 시작되고, 발전하기에, 그것이 불편한 줄 알면서 나는 오늘도 사랑과 여행에 설레고, 계속해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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