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 트러스트는 왜 골칫덩이가 되었나

[글로벌 리포트 | 영국]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BBC 트러스트(BBC Trust)의 존폐가 심각하게 논의되고 있다. BBC 트러스트는 2007년에 영국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으로서 출범해 BBC의 수신료 수입을 감독하고 있는, 그야말로 BBC의 최고기관이다.


그런데 이런 BBC 트러스트를 폐지하고 그 주요 권한을 정부에 소속된 방송통신규제기관인 오프콤(Ofcom)에 이양할 것을 주장하는 ‘BBC 거버넌스와 규제에 대한 평가’ 보고서가 지난 3월 1일에 정부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되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보고서의 작성을 의뢰한 것은 다름아닌 존 위팅데일(John Whittingdale) 문화부 장관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보고서에 대한 BBC 트러스트와 오프콤의 반응이다. 두 기관은 보고서가 공개되자마자 그 내용에 동의한다고 일제히 이를 반겼다. BBC 트러스트의 수장인 로나 페어헤드(Rona Fairhead)는 공개적으로 해당 보고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그 안에 담겨진 제안들을 구체화하기위해 “정부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는 바람까지 밝혔다. 오프콤의 대변인 역시 “클레멘티의 시각을 주목한다”며 “미래 BBC의 규제에 대한 정부의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코멘트를 남겼다.


그 폐지안의 대상자인 BBC 트러스트마저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기묘한 상황을 이해하려면 BBC의 ‘국민 MC’, 지미 새빌(Jimmy Savile)의 성범죄 스캔들이 터진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BBC 트러스트의 수난사가 시작된 해이다.


중년의 나이까지도 활발하게 연예 활동을 펼쳤던 새빌은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봉사활동에 열심이었다. 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공로를 인정받아 1990년에는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는다. 그런데 2011년에 그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후부터 놀라운 폭로가 이어졌다. 새빌이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방송국과 봉사활동을 벌이던 병원에서 수백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지난 3년간 BBC를 대상으로 내부 조사를 벌인 쟈넷 스미스(Janet Smith)은 지난 2월 25일, 실제 새빌이 BBC 방송국 내부에서만 공식적으로 16건의 성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혔다.


과연 BBC에게는 이 전무후무한 성범죄에 대한 책임이 없는 걸까? BBC의 경영진이 새빌의 범죄를 방조한 것이 아니냐에 대한 의혹이 불거졌고, 그 성범죄를 예방하거나 막지못한 데에는 국민이 낸 수신료로 운영되는 BBC의  거버넌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비난 여론이 이어졌다. 당시 BBC의 경영진은 결코 자신들은 몰랐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곧바로 새빌의 범죄를 다룬 BBC의 시사물 ‘뉴스나이트’(Newsnight)의 방영이 내부지시로 취소된 사실이 폭로됐다.


결국 당시 BBC의 사장이었던 조지 엔트위슬(George?Entwistle)이 그 일에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뉴스나이트’ 방영이 취소됐을 당시의 사장이었던 마크 톰슨(Mark Thompson) 역시 비난의 화살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뉴욕타임즈’의 최고위자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지만 현재까지도 새빌 스캔달과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BBC 트러스트의 폐지안은 이때부터 건의되기 시작했다. 물론 출범 이래 BBC 트러스트는 수신료나 BBC 서비스 규모를 두고 정권과 종종 충돌해왔다. 하지만 새빌 사건으로 세계적인 ‘공영방송’의 권위가 땅 밑으로 추락한데다, 엎친데덮친격으로 1억 파운드가 투입된 DMI(digital media initiative) 사업까지 실패로 돌아가자 그 최고기관인 BBC 트러스트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비난여론이 정파를 가리지 않고 확산되었다. 


클레멘티가 이번에 작성한 보고서는 BBC 트러스트를 “완벽한 실수”라고 규정하며, BBC를 감독해야하는 기관이 최고의사결정기구도 겸임하는 구조 자체가 아이러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최고의사결정기구로의 역할은 BBC의 사장이 의장을 맡는 집행이사회의 역할과 겹쳐져 그 운영에서 혼란을 야기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일원화된 집행이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고도 제안했다. 즉, BBC 트러스트를 폐지하고 그것의 감독 기능은 오프콤에게, 나머지 의사결정 기능은 새롭게 일원화된 집행이사회에게 이양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결론에 그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BBC 트러스트의 폐지안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할 수 있다. 영국의 일간지들은 ‘브렉시트’ 투표 이후에 공개될 왕실 칙허장 갱신에 대한 정책보고서, 백서(White paper)를 통해 그 폐지안이 정책으로 승인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한다. 이렇게, 한 때 BBC의 독립성을 상징했던 기관은 그 소멸을 목전에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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