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구 SBS 기자
코너의 이름은 ‘좋아요’라지만 ‘싫어요’부터. 싫은 게 많아졌다. 앞서 걷는 사람이 흘려보내는 담배연기, 일단 들이밀고 보는 ‘끼어들기’ 차량, 좀 어리다 싶으면 으레 하대하고 보는 아저씨들…. 취향보다는 합의가 덜된 예의 문제겠으나 어쨌든 짜증부터 난다. 짜증내봤자 바뀌는 건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알기에 참아보지만 어쩔 수 없다. 왜 이렇게 사소한 것에 짜증만 낼까, 난 온화하고 친절한 이미지를 갖고 싶은데. 그런 나 자신에게 또 짜증난다.
짜증을 넘어 공공연히 “분노하라”고 선동하는 책 두 권이 있다. 하나는 제목부터 그러한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5년의 시차를 두고 나온 다른 책은 장하성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 최근 힘겹게 경제학자인 장하성의 책을 읽고 나니 레지스탕스 출신 지식인 에셀의 저 책이 떠올랐다. 두 책의 큰 차이는 분량이다. 각주와 후기 등을 제하면 에셀의 책은 30쪽에 불과하다. 장하성의 책은 반면 400쪽이 넘는다. “분노하라”고 촉구한다는 건 공통적이나, 에셀은 좀 더 단순 명쾌하고 장하성은 ‘당신이 분노해야 하는 이유’를 논증하려 애쓴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와 장하성의 ‘왜 분노해야 하는가’.
갖은 볼썽사나운 뉴스에 잠시 궁시렁대다 이내 침묵한다. 세상사에 곧잘 분노하고 뭔가 하려고 했던, 내가 쓴 기사로 세상을 바꾸겠노라며 언론사 문을 두드렸던 그 20대 청년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짜증만 낼 뿐 분노할 줄 모르는 40대 임박한 중년이 돼 버렸나. 사소한 것에 짜증만 내다 분노할 줄도 모르고 자격도 없어진 게 아닌지 새삼 돌아본다. “분노하라”는 저 책들, 요즘 좋아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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