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야기가 신문에 나왔다고 태일이는 활짝 웃었다

[밖에서 본 기자, 밖에서 본 언론] (6)전태일 친구들, 이승철·최종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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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근로기준법 읽어주던
똑똑하고 순수했던 친구 전태일
기사 나왔을 때 흥분했던 기억

태일의 전신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점퍼 벗어 불길 끄면서 들었던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못 잊어

종인씨 전태일 재단에 1억 기부
승철씨 캄보디아에 학교 지어줘
“태일이의 정신 계속 간직할 것”


이승철(68)씨는 46년 전이지만 전태일과의 첫 만남을 똑똑히 기억했다. 1970년 9월 중순, 추석 대목이 끝나 평화시장이 잠시 한가하던 때였다. 먼 친척이자 친구인 최종인과 국민은행 앞길에 있는데 전태일이 다가왔다. 최종인은 이승철에게 “참 재미있는 친구”라고 전태일을 소개했다. 전태일은 검정 바바리코트에 건빵모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전태일은 “동양방송에 가는 길인데, 같이 안 갈래”하고 물었다. 동양방송 ‘시민의 소리’라는 프로그램에 나가 평화시장의 근로환경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승철은 최종인과 함께 전태일을 따라 서소문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전태일의 곁에는 늘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의 싸움은 외롭지 않았다. 전태일의 친구들인 최종인(사진 왼쪽)·이승철씨가 지난 17일 청계천6가 평화시장 앞 전태일 다리(버들다리)에 세워진 전태일 기념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강아영 기자)

“태일이가 버스 안에서 근로기준법 책을 꺼내 큰 소리로 읽어주더군요. 근로시간(제42조), 유급휴일(제45조), 건강진단(제71조) 등의 항목이었는데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태일이 하는 말이 처음 듣는 내용이고, 그런 법이 있는 줄 몰랐거든요. 일요일마다 쉴 수 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불길 속에서 외칠 때 최종인(68)씨는 거기에 있었다. 1970년 11월13일 오후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에서 불길에 휩싸인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구호를 외쳤다. 불길은 전태일의 전신을 휘감았고 화마를 이기지 못한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태일아! 불 꺼!” 소리를 지르며 최종인은 전태일에게 내달렸다. 자신의 점퍼를 벗어 덮었으나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는 참혹한 형상이었습니다. 머리칼은 불에 타고, 입술은 퉁퉁 불고 눈꺼풀은 뒤집히고…. 숯 덩어리 같았습니다. 불을 끄며 울부짖는 중에 태일이가 몸을 일으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내...죽음을 헛되이...말라...’고 얘기했어요….” 최씨는 말을 잇지 못하며 울먹였다. “그 때 상황을 얘기하기가 싫어요. 지금까지 머릿속에 있어요….”

전태일과의 만남
전태일과의 만남과 그의 죽음은 이승철·최종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10대 후반인 어린 나이에 청계천으로 흘러들어와 재단기술을 배워 가난을 벗어나고자 했던 두 사람은 전태일을 만나면서 세상에 눈을 떴다. 전태일과 함께 삼동회를 만들어 평화시장 노동여건 개선을 위해 싸웠고, 전태일의 죽음 이후 그의 뜻을 받들어 청계피복 노조를 결성해 노동운동을 하다가 경찰에게 얻어맞고 끌려가고 옥고도 치렀다. 결혼해 아이들이 딸린 가정을 꾸리면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갔지만 평화시장을 아주 떠날 수 없었다. 전태일 추도식이나 관련 행사를 도왔고, 1980년대 말 ‘청우회’란 친목단체를 만들어 전태일 기념사업을 후원해왔다. 최근에 최종인씨는 장학 사업을 위해 전태일재단에 장학금 1억원을 내놓았고, 이승철씨는 한국희망재단에 1억원을 기탁해 캄보디아의 낡은 학교에 새 교실을 지어주었다. 두 사람을 지난 17일 서울 창신동 전태일재단에서 만났다.

▲지난 17일 서울 창신동 전태일재단 다목적홀에서 이승철(사진 왼쪽)·최종인씨가 기자협회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1970년 11월27일 청계피복 노조가 세워졌고, 그 다음해에 야학을 열었습니다.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어린 여공들이 10평도 안 되는 노조 사무실을 꽉 메웠어요. 다들 배움을 갈망했죠. 청계피복 노조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청우회를 만든 게 25년 전입니다. 못 배운 한이 있던지 회원 가운데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있고, 70살이 넘어서 중학과정을 공부하고 있는 이도 있어요. 모두들 ‘평화대학’을 나온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개인적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에서 상점 점원으로 일하며 야간학교를 다녔습니다. 못 배웠지만 노조를 하면서 사회를 배웠지요. 90년대 초부터 장학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시작하네요.”(최종인) 최씨는 한 달에 80만~90만원씩 10년간 모은 적금을 털어 1억원을 전태일재단에 내놨다. 전태일재단은 지난 16일 수혜자 10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최씨는 올해 청우회 회원들 중심으로 1억5000만원을 모으고 5년 뒤 10억원 가량을 더 모아 장학재단을 설립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승철씨는 지난해 캄보디아 북서부 바탐방 지역에 위치한 훈센 중·고교 교사 신축을 위해 한국희망재단에 1억원을 냈다. “8년 전쯤 TV에서 타이의 미얀마 난민촌에 한국 사람들이 지어준 학교를 본 적이 있어요. 그때 나도 학교를 지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장소를 마련하면 여러 사람이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이씨는 지난 1월 자신이 기탁한 1억원으로 지은 교실 6칸과 여학생 화장실 2칸짜리 학교 건물 준공식에 다녀왔다. 16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며 박수를 치는데 눈물 밖에 안 나왔다고 했다.


“태일이에게 항상 빚지고 사는 마음이죠. 노동현장에 남아 노동운동을 계속했어야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1981년 성동구치소에서 나왔을 때 사회는 완전히 얼어있고, 아이들이 5살, 7살이었는데 사는 게 문제더군요. 재단사로 일하다가 84년 1월부터 봉제공장에 지퍼를 납품하는 가게를 차렸어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늘 머릿속에 태일이의 일을 해야 한다는 죄책감을 갖고 삽니다.”(이승철)


이승철과 최종인이 전태일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동양방송에 다녀온 뒤였다. 동양방송을 거쳐 시청에 갔다가 최종인의 취직 약속 때문에 먼저 돌아온 두 사람은 그날 오후 상기된 표정의 전태일을 다시 만났다. 전태일은 시청 근로감독관에게 거절을 당하고 노동청에 찾아갔다가 신문기자들을 만났다고 했다.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기자들이 실태조사를 더 많이 해서 집단으로 진정서를 제출하면 그것을 토대로 기사를 써줄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1970년 10월7일자 경향신문 사회면 톱기사.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전태일이 제안한 모임에 참여했다. 모임의 이름은 평화시장·통일상가·동화시장의 재단사가 힘을 합쳤다는 뜻의 ‘삼동회’였다. 1970년 9월16일 정식으로 결성식을 가진 삼동회는 태일이가 1년 전 바보회 시절에 돌리다 남은 설문지 200장을 갖고 실태조사를 다시 시작했다. 현장에서 나름대로 영향력이 있는 재단사들이 뭉치자 며칠 만에 설문지 126장이 걷혔다. 삼동회는 설문지를 분석해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만들어 90여명의 서명을 받아 노동청에 제출했다. 여러 신문사에 투고도 했다. 진정서를 제출한 다음날인 10월7일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등 몇몇 석간신문에 기사가 실렸다. 특히 경향신문에는 사회면 톱기사로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이라는 제목의 진정서를 요약한 기사가 큼직하게 실렸다.

“기적이 일어났다”
“우리 이야기가 신문에 났다는 걸 알고 경향신문사로 달려갔어요. 현금이 없어 종인이 손목에 있던 탱크시계를 맡기고 신문 300부를 샀죠. 큰 모조지를 잘라 조끼처럼 만든 후 ‘평화시장 기사특보’라고 써서 입고 시장을 활보하고 다녔습니다. 시다들에게 무료로 주고 재단사와 미싱사들에겐 팔기도 했는데 ‘수고가 많다’면서 100원, 200원을 주고, 1000원을 내는 사람도 있었죠. 우리 요구대로 다 바뀔거라고 생각했어요.”(이승철)
고 조영래 변호사는 ‘전태일 평전’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기적이 마침내 일어났다”고 적었다. “그날 저녁, 평화시장 일대는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군데군데에 노동자들이 몰려서서 신문 한 장을 두고 서로 어깨너머로 읽으면서 웅성거렸다. 평화시장의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신문이라고 하는 것은 높은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 바로 그들이, 바로 그 신문에 하찮은 쓰레기 인간들인 자신들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이라도 하듯 실려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통곡과 탄식과 울분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이었다.”(전태일 평전 267쪽)


“태일이랑 노동청 기자실에 수없이 다녔어요. 기자들은 우리에게 격려의 말을 많이 했습니다. 신문 보도가 나오자 우리는 용기백배했고, 시장이 변하리라는 희망으로 들떠 있었어요. 사실 태일이에게 기자들이 용기를 준 것 같아요. 태일이가 결정적인 결심을 한 게 평화시장 보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사를 보고 시장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거죠. 기사 때문에 죽을 각오도 했다고 봐야 합니다.”(최종인)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자”
언론 보도가 나오고 평화시장과 노동청은 발칵 뒤집혔다. 근로감독관이 평화시장에 왔고, 평화시장을 관리하는 평화시장 주식회사에서 진정서를 낸 삼동회원을 찾았다. 사장들은 환풍기 설치와 형광등 교체 등을 약속했고, 근로감독관은 근로환경 개선을 말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고,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근로조건 개선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경비와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원천차단하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시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삼동회는 다시 모였다.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자고 제안했다.


“회비를 100원씩 모아서 플래카드를 만들고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위해 휘발유도 사기로 했습니다. 태일이는 ‘탁자 하나를 준비해뒀다가 자신이 그 위에 올라가 근로기준법 중에 몇 개 중요한 조문을 소리내어 읽고, 지켜지지도 않는 조문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외치면 따라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이승철)


▲전태일이 분신한 장소에 있는 동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1970년 11월13일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외치며 이곳에서 산화하다’는 글귀가 있다.

청계피복 노조의 역사가 담긴 안재성의 ‘청계, 내청춘’은 전태일 분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11월13일 오후 1시. 국민은행 앞 공터에는 200명 넘는 노동자들로 술렁였고 곳곳에 정복 경찰관들이 깔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평화시장 3층 복도에서 회원들이 일제히 플래카드를 펼치고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2층 복도까지 내려갔을 때 경찰들과 형사들이 뛰어와 플래카드를 뺏으려 들었다. 안 뺏기려 승강이를 벌이자 종이로 만든 플래카드는 그냥 찢어져 못쓰게 됐다. 흥분한 삼동회 회원들이 ‘좋다! 플래카드가 없으면 못 할 줄 알아?’하면서 몰려 내려가려 할 때였다. 전태일이 말했다. “너희들 먼저 내려가서 담뱃가게 옆에서 기다려라. 난 좀 있다 갈테니…. 삼동회 회원들이 담뱃가게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몇 분 지나지 않아 전태일이 내려왔다. 전태일은 김영문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김영문이 전태일을 뒤따랐을 때 갑자기 전태일이 휙 돌아서더니 성냥불을 일으켜 자기 몸에 댔다. 가슴 부위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전태일은 불길 속에 외쳤다.”(청계, 내청춘 55~56쪽)


분신 현장에 있었던 최종인은 “태일이가 불덩어리로 튀어나왔다”고 했다. “오늘도 글러먹었다. 다 뺏겨버렸다”는 말을 듣고 시위가 실패한 줄 알고 공장으로 돌아갔던 이승철은 “태일이가 타부렀다”는 이야기를 오후 3시쯤 공장 다락방에서 친구에게 들었다. 면도칼로 손가락을 그어 쓴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인 최종인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다음날 풀려났다. 그는 이승철과 함께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된 성모병원 영안실에 갔다. 한때 전태일에게 재단기술을 가르쳐주고 종인에게 태일을 소개했던 고참 재단사 신기호가 말했다. “태일이는 너희와 함께 싸우다 죽었으니 너희들이 책임지고 그 뜻을 이어야하지 않겠어? 나도 도와줄테니 앞장서서 싸워라.”


두 사람은 1971년부터 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소선씨 집에 살면서 청계피복 노조를 이끌었다. 최종인씨는 삼동회 출신으로 첫 위원장을 맡아 6년 가량 노조를 이끌었고, 70년대 후반 위원장을 역임한 이승철씨는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노조를 강제해산할 때까지 노조의 중심에 있었다.

“태일이는 정의로운 사람”
두 사람은 전태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태일이는 한마디로 정의롭고 올바른 사람이었어요. 시다들이 밥도 못 먹고 일하면 풀빵을 사서 먹였죠. 순수했죠. 따를 수밖에 없는 친구였어요.”(최종인)


“순하고 예의바른 친구였어요. 당시는 더벅머리가 유행이었는데 태일이는 얌전히 머리를 깎고 있었죠. 술·담배도 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술 안시면 얘기 안 한다’고 하면 마지못해 한 잔 마시곤 했죠. 노조가 만들어지고 태일이 집에 갔어요. 주위에 공동묘지가 있는 무허가 판잣집이었습니다. ‘나도 못살지만, 너무한 동네다. 이런 데 살면서 어떻게 남을 위해 살 생각을 했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태일이가 존경스러웠어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평화시장에서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두 사람은 부담스럽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인터뷰 중간에 합석했던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친구 보러가는 셈치고 가자고 설득한 후에야 평화시장으로 향했다. 평화시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전태일 기념상을 가운데 두고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태일과 두 친구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울 나이인 스물둘에 만났다. 짧지만 강렬했던 완전한 만남이었다. 옛 친구들이 온 까닭일까. 청계천 겨울바람은 매서웠지만 목도리를 두른 전태일은 따뜻해보였다.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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