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에서 근로기준법 읽어주던
똑똑하고 순수했던 친구 전태일
기사 나왔을 때 흥분했던 기억
태일의 전신이 불길에 휩싸였을 때
점퍼 벗어 불길 끄면서 들었던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못 잊어
종인씨 전태일 재단에 1억 기부
승철씨 캄보디아에 학교 지어줘
“태일이의 정신 계속 간직할 것”
이승철(68)씨는 46년 전이지만 전태일과의 첫 만남을 똑똑히 기억했다. 1970년 9월 중순, 추석 대목이 끝나 평화시장이 잠시 한가하던 때였다. 먼 친척이자 친구인 최종인과 국민은행 앞길에 있는데 전태일이 다가왔다. 최종인은 이승철에게 “참 재미있는 친구”라고 전태일을 소개했다. 전태일은 검정 바바리코트에 건빵모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전태일은 “동양방송에 가는 길인데, 같이 안 갈래”하고 물었다. 동양방송 ‘시민의 소리’라는 프로그램에 나가 평화시장의 근로환경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승철은 최종인과 함께 전태일을 따라 서소문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불길 속에서 외칠 때 최종인(68)씨는 거기에 있었다. 1970년 11월13일 오후 평화시장 국민은행 앞에서 불길에 휩싸인 전태일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 구호를 외쳤다. 불길은 전태일의 전신을 휘감았고 화마를 이기지 못한 그는 바닥에 쓰러졌다. “태일아! 불 꺼!” 소리를 지르며 최종인은 전태일에게 내달렸다. 자신의 점퍼를 벗어 덮었으나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그 모습은 차마 볼 수 없는 참혹한 형상이었습니다. 머리칼은 불에 타고, 입술은 퉁퉁 불고 눈꺼풀은 뒤집히고…. 숯 덩어리 같았습니다. 불을 끄며 울부짖는 중에 태일이가 몸을 일으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내...죽음을 헛되이...말라...’고 얘기했어요….” 최씨는 말을 잇지 못하며 울먹였다. “그 때 상황을 얘기하기가 싫어요. 지금까지 머릿속에 있어요….”
전태일과의 만남
전태일과의 만남과 그의 죽음은 이승철·최종인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10대 후반인 어린 나이에 청계천으로 흘러들어와 재단기술을 배워 가난을 벗어나고자 했던 두 사람은 전태일을 만나면서 세상에 눈을 떴다. 전태일과 함께 삼동회를 만들어 평화시장 노동여건 개선을 위해 싸웠고, 전태일의 죽음 이후 그의 뜻을 받들어 청계피복 노조를 결성해 노동운동을 하다가 경찰에게 얻어맞고 끌려가고 옥고도 치렀다. 결혼해 아이들이 딸린 가정을 꾸리면서 평범한 생활로 돌아갔지만 평화시장을 아주 떠날 수 없었다. 전태일 추도식이나 관련 행사를 도왔고, 1980년대 말 ‘청우회’란 친목단체를 만들어 전태일 기념사업을 후원해왔다. 최근에 최종인씨는 장학 사업을 위해 전태일재단에 장학금 1억원을 내놓았고, 이승철씨는 한국희망재단에 1억원을 기탁해 캄보디아의 낡은 학교에 새 교실을 지어주었다. 두 사람을 지난 17일 서울 창신동 전태일재단에서 만났다.
이승철씨는 지난해 캄보디아 북서부 바탐방 지역에 위치한 훈센 중·고교 교사 신축을 위해 한국희망재단에 1억원을 냈다. “8년 전쯤 TV에서 타이의 미얀마 난민촌에 한국 사람들이 지어준 학교를 본 적이 있어요. 그때 나도 학교를 지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장소를 마련하면 여러 사람이 공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이씨는 지난 1월 자신이 기탁한 1억원으로 지은 교실 6칸과 여학생 화장실 2칸짜리 학교 건물 준공식에 다녀왔다. 1600명이 넘는 학생들이 나와서 태극기를 흔들며 박수를 치는데 눈물 밖에 안 나왔다고 했다.
“태일이에게 항상 빚지고 사는 마음이죠. 노동현장에 남아 노동운동을 계속했어야 하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어요. 1981년 성동구치소에서 나왔을 때 사회는 완전히 얼어있고, 아이들이 5살, 7살이었는데 사는 게 문제더군요. 재단사로 일하다가 84년 1월부터 봉제공장에 지퍼를 납품하는 가게를 차렸어요.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늘 머릿속에 태일이의 일을 해야 한다는 죄책감을 갖고 삽니다.”(이승철)
이승철과 최종인이 전태일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한 것은 동양방송에 다녀온 뒤였다. 동양방송을 거쳐 시청에 갔다가 최종인의 취직 약속 때문에 먼저 돌아온 두 사람은 그날 오후 상기된 표정의 전태일을 다시 만났다. 전태일은 시청 근로감독관에게 거절을 당하고 노동청에 찾아갔다가 신문기자들을 만났다고 했다.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기자들이 실태조사를 더 많이 해서 집단으로 진정서를 제출하면 그것을 토대로 기사를 써줄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태일이랑 노동청 기자실에 수없이 다녔어요. 기자들은 우리에게 격려의 말을 많이 했습니다. 신문 보도가 나오자 우리는 용기백배했고, 시장이 변하리라는 희망으로 들떠 있었어요. 사실 태일이에게 기자들이 용기를 준 것 같아요. 태일이가 결정적인 결심을 한 게 평화시장 보도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기사를 보고 시장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거죠. 기사 때문에 죽을 각오도 했다고 봐야 합니다.”(최종인)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자”
언론 보도가 나오고 평화시장과 노동청은 발칵 뒤집혔다. 근로감독관이 평화시장에 왔고, 평화시장을 관리하는 평화시장 주식회사에서 진정서를 낸 삼동회원을 찾았다. 사장들은 환풍기 설치와 형광등 교체 등을 약속했고, 근로감독관은 근로환경 개선을 말했다. 그러나 하루하루 지나고, 기다리고 기다렸지만 근로조건 개선 움직임은 없었다. 오히려 경비와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원천차단하며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시장에는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삼동회는 다시 모였다. 전태일은 친구들에게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갖자고 제안했다.
“회비를 100원씩 모아서 플래카드를 만들고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위해 휘발유도 사기로 했습니다. 태일이는 ‘탁자 하나를 준비해뒀다가 자신이 그 위에 올라가 근로기준법 중에 몇 개 중요한 조문을 소리내어 읽고, 지켜지지도 않는 조문이 다 무슨 소용이냐고 외치면 따라하면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건이 발생한 겁니다.”(이승철)
분신 현장에 있었던 최종인은 “태일이가 불덩어리로 튀어나왔다”고 했다. “오늘도 글러먹었다. 다 뺏겨버렸다”는 말을 듣고 시위가 실패한 줄 알고 공장으로 돌아갔던 이승철은 “태일이가 타부렀다”는 이야기를 오후 3시쯤 공장 다락방에서 친구에게 들었다. 면도칼로 손가락을 그어 쓴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인 최종인은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다음날 풀려났다. 그는 이승철과 함께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된 성모병원 영안실에 갔다. 한때 전태일에게 재단기술을 가르쳐주고 종인에게 태일을 소개했던 고참 재단사 신기호가 말했다. “태일이는 너희와 함께 싸우다 죽었으니 너희들이 책임지고 그 뜻을 이어야하지 않겠어? 나도 도와줄테니 앞장서서 싸워라.”
두 사람은 1971년부터 전태일의 어머니 고 이소선씨 집에 살면서 청계피복 노조를 이끌었다. 최종인씨는 삼동회 출신으로 첫 위원장을 맡아 6년 가량 노조를 이끌었고, 70년대 후반 위원장을 역임한 이승철씨는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노조를 강제해산할 때까지 노조의 중심에 있었다.
“태일이는 정의로운 사람”
두 사람은 전태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태일이는 한마디로 정의롭고 올바른 사람이었어요. 시다들이 밥도 못 먹고 일하면 풀빵을 사서 먹였죠. 순수했죠. 따를 수밖에 없는 친구였어요.”(최종인)
“순하고 예의바른 친구였어요. 당시는 더벅머리가 유행이었는데 태일이는 얌전히 머리를 깎고 있었죠. 술·담배도 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술 안시면 얘기 안 한다’고 하면 마지못해 한 잔 마시곤 했죠. 노조가 만들어지고 태일이 집에 갔어요. 주위에 공동묘지가 있는 무허가 판잣집이었습니다. ‘나도 못살지만, 너무한 동네다. 이런 데 살면서 어떻게 남을 위해 살 생각을 했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태일이가 존경스러웠어요.”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평화시장에서 사진을 찍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두 사람은 부담스럽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인터뷰 중간에 합석했던 이수호 전태일재단 이사장이 친구 보러가는 셈치고 가자고 설득한 후에야 평화시장으로 향했다. 평화시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전태일 기념상을 가운데 두고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전태일과 두 친구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울 나이인 스물둘에 만났다. 짧지만 강렬했던 완전한 만남이었다. 옛 친구들이 온 까닭일까. 청계천 겨울바람은 매서웠지만 목도리를 두른 전태일은 따뜻해보였다.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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