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들 길바닥 언어를 잃다

제296회 이달의 기자상 전문보도 사진 / 한국일보 박서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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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박서강 기자

도로 위 교통 표지판이 하나 같이 흐릿하거나 잘못된 방향을 지시하고 있다면 운전자에겐 낭패가 아닐 수 없다. 이정표만을 믿고 가는 초행길이라면 더더욱 큰 일이다. 목적지에 닿기도 전에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에게 길 바닥의 유도블록은 곧 이정표다. 보통 일직선 모양은 ‘이 방향대로 진행’을, 동그라미 여러 개는 ‘방향이 바뀌거나 갈라짐, 또는 전방에 장애물이 있음’을 뜻한다. 그런데 서울 도심 거리에 설치된 이 시각장애인용 이정표 상당수가 엉터리다. 유도블록을 따라 걸어보면 꼭 필요한 곳에는 없거나 블록 모양이 갖는 의미를 무시한 채 주먹구구로 설치한 곳이 적지 않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비장애인의 눈높이로 설치하고 관리해온 까닭에 맞춤법부터 방향 지시까지 엉망인 경우가 허다하다. 


명동의 사정은 경기 고양시의 경우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편이다. 구조상 위험에 노출되기 쉬운 중앙차로 버스정류장 10여 곳에서 유도블록 수백 개가 뜯기거나 깨져 있었다. “이미 파악은 하고 있지만 예산 문제 때문에 당장 교체가 어렵다”는 시청 관계자의 뻔뻔한 해명은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우리 장애인 정책의 민낯 그 자체였다. 


감격스러운 수상 소식에 잊고 있던 숙제가 떠올랐다. “기사와 함께 올려주신 동영상은 시각장애인들이 확인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잠시 시간을 내주시어 음성 멘트를 넣어 주십사…” 


보도 직후 배달된 독자 편지는 나 역시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사실, 바쁘다는 핑계로 문제의 동영상 수정작업은 여태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목청 높여가며‘장애인에 대한 배려’운운하더니 그새 유도블록 따위 관심도 없는 대다수 비장애인 중 하나로 돌아간 건 아닌지, 부끄러운 고백으로 수상소감을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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