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묘지에서
‘옥환아, 이제 나오너라. 이 땅에 일어나 말하여라. 암매장된 너의 육신을 깃발처럼 흔들며 천둥번개로 말하여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행불자 묘역. 주인을 잃은 임옥환씨의 묘비는 33년째 절규하고 있다.
전남 고흥에서 광주시로 유학을 와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에 다녔던 그는 1980년 5월 22일 ‘실종’됐다. 고교 2학년이던 그는 그날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하러온 계엄군 때문에 위험해진 광주를 잠시 벗어나있기로 하고, 고흥으로 가기 위해 고향 선배와 조선대 뒷산을 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고향, 어머니 품으로 향하던 17살 소년은 ‘5·18행방불명자’라는 이름으로 33년째 길을 잃었다.
임옥환 씨처럼 ‘행방불명자’로 이제 서른세 번째 5월을 맞아야 하는 사람은 현재까지 76명. 5·18 보상법이 제정된 지난 1990년 이후 6차 보상이 진행 중인 현재까지 행방불명자로 441명이 신청해 76명만이 인정받았다.
공식적으로 76명은 33년 전 5월 이후 아무런 행적도 확인되지 않고 있는 셈이다. 76명 중 유해가 발견된 사람은 현재까지 6명이 전부. 2001년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구 묘역에 있던‘무명열사’ 묘 11기를 국립 5·18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6기가 행불자와 겹치는 사실이 확인됐다.
‘너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고 영원한 역사의 증명이 될 것으로 믿는다. ’행불 자 고재덕씨의 묘비 비문은 그래서 아직도 유효하다.
32년 전 봄으로 향하다
한꺼번에 76명이 실종된 사건이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온 나라가 뒤집히고, 전 세계적인 이목까지 끌었을 것이었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의문에서 기사를 시작했다.
‘행방불명(실종) 76명’은 대한민국 건국 이래 단일사건으로는 최대 실종사건이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진 것은 32년 전.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니었다.
취재팀이 가진 또 한 가지 생각은 국방부가 실시하고 있는‘6·25전사자 유해발굴 사업’이었다. 60여 년 전 시신도 발굴이 되는데 왜 32년 전 사건과 관련해서는 단 1구의 유해도 발굴되지 않을까?
대한민국을 수호하다 산화한 호국영령의 유해를 반드시 찾아야 한다면, 민주화를 외치다 사라진 사람들의 유해도 최소한 같은 가치로 찾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취재팀이 5·18 32주년을 앞두고 ‘5·18 행방불명자’ 문제를 꺼내기로 한 이유였다. 그렇게 2012년 3월 취재가 시작됐다.
1990년 5·18 보상법이 제정된 이후 6차 보상이 진행 중인 현재까지 5·18 행방불명자로 보상 신청을 한 사람은 무려 441명. 이중 5·18관련자로 인정돼 보상을 받은 사람은 76명뿐이었다.
5·18민주화운동이 벌어졌던 항쟁 10여일 사이, 실종돼 아직까지 행적조차 확인되지 않은 이들은 그동안 ‘5·18의 그림자’였다. 국가로부터도, 지방자치단체로부터도, 시민들의 기억 속에서도 실종된 상태인 셈이다.
그동안 광주시가 시민 제보를 받아 유해를 발굴하기 위해 9차례 발굴 작업을 했지만 모두 관련이 없었다. 게다가 이마저도 최근 몇 년 전부터는 중단된 상태였다.
취재를 진행할수록 우리는 정말 5·18행불자는 찾을 수 없는 것인지 궁금해 졌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기로 했다. 과연 행불자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은 언제 어디에서 사라진 것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면 유해를 찾을 수 있는 길도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는 32년 전 광주의 봄으로 들어갔다.
실종된 정책, 잊힌 사람들
우선 행방불명자로 보상 신청을 해 유공자로 인정받은 76명의 자료를 확보하는 게 시급했다.
취재는 처음부터 난관이었다. 광주시청과 5·18기념재단 등 관련 기관에서 조차 이들 76명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었다.
쉽게 기본 자료를 입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취재는 처음부터 ‘자료의 벽’에 가로막혔다. 결국 취재 범위를 더 넓히기로 했다.
전남대 5·18연구소 및 호남학연구원, 국립5·18민주묘지, 5·18유족회 등 5월 단체, 국가 기록원, 80년 5월 당시 주한미국대사관과 미 국무성이 긴급으로 주고받은 체로키 문서 등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관련 자료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수차례 만나기도 했다. 공개되지 않고 있는 1980년 국방부 관련 자료를 본 서울지역 학자들에 대한 인터뷰도 시도했다. 하지만 얻을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았다.
행불자 가족들의 일부도 취재진을 밀어냈다. 가슴 깊은 곳에 겨우 묻어둔 이야기를 다시 꺼내게 하는 건, 정말이지 힘든 일이었다.
그렇게 취재팀은 행불자 76명에 대한 자료를 이곳저곳에서 짜깁기 하고 있었다. 2012년 5월1일자 신문에 첫 보도를 하기로 한 만큼, 시간은 촉박했다.
첫 보도 때는 76명의 사진과 이름, 나이, 행방불명 일시를 정리해 보도하기로 했지만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사진을 확보하는 것이 힘들었다. 결국 취재팀이 찾아낸 사진은 절반 정도에 그쳤다.
취재가 진행될수록 관계기관의 행방불명자에 대한 자료 부실은 심각했다. 가장 먼저 부닥친 문제는 행불자 인정자는 76명인데 국립 5·18민주묘지 행불자 묘역에는 66명 만 묘비가 세워져 있다는 점 이었다.
먼저 민주묘지에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느냐’고 물었다. 묘지관리소측은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광주시 관련 부서에 같은 내용을 문의했다. 그렇지만 광주시도 당장 답변을 내놓지 못했다. 묘지관리소와 광주시를 통해 ‘2001년 무명열사 6명이 행불자로 확인되면서 이들이 제 4묘역에 다시 안장됐다’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이틀이 걸렸다.
그렇다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4명의 묘비가 없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그렇다면 4명의 묘비는 왜 없느냐’고 다시 질의했다. 그리고 이 문제의 궁금증을 해소하는데 또 다시 며칠이 흘렀다.
광주시가 보내온 최종 답변은 ‘4명의 경우 유족들이 묘지 안장 신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들이 왜 국립묘지 안장을 신청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76명인 행불자의 묘지 안장 여부를 확인하는 데에도 이처럼 많은 시간이 걸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드러나는 5월의 진실
우리는 확보한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행불자들을 이름과 나이, 성별, 당시 직업, 정확한 행방불명 일시와 장소 등으로 분류해 봤다.
5·18 행불자에 대한 사실상 처음으로 시도된 입체 분석이었다. 이 작업에는 2주가 꼬박 걸렸다. 그리고 행방불명자들의 실체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행불자 76명 중 남자가 60명으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여성은 13명 이었다. 사진이나 주민등록번호, 기록상으로는 성별을 정확히 확인하기 힘든 경우도 3명 있었다.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은 1980년 당시 5살 이었던 박광진 군과 백근옥 양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당시 66세였던 박갑용씨 였다.
특히 행불자 76명 중에는 일가족 4명이 포함돼 있었다. 가장 나이어린 행불자인 박광진군 가족이 다. 박 군은 1980년 5월21일 무안에서 외할머니 임소례(57)씨와 외삼촌 김병균(23)·병대(14)씨와 기차를 타고 광주로 왔다가 모두 실종 됐다. 일가족 행불자는 박 군 가족이 유일했다.
행불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시기는 5·18 초기라는 특징도 있었다. 5월20일을 전후해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5월21일 무려 20명의 행불자가 한꺼번에 발생했다. 전날인 5월20일에도 13명이 사라졌다. 전체 행불자의 40% 정도가 이틀 동안 생긴 것이다.
행불자가 대량으로 발생하던 때는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고 공수부대가 무력 진압의 강도를 높이던 시기와 겹쳤다.
또 76명 중 주변 사람들에게 목격된 행불자는 48명이었는데 이들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 광주시내와 도청 등 도심권이 37명이나 됐다. 이곳은 항쟁 당시 계엄군과 시위대의 충돌이 가장 치열했던 곳이다.
반드시 찾아주어야 할 봄
2012년 5월, 모두 5회로 걸쳐 전남일보에 행방불명자 관련 보도가 나가자 지역의 이목이 집중됐다.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는 반응도 많았다.
그동안 광주·전남지역 언론에서 5·18과 관련한 특집·기획 보도는 수없이 이뤄져 왔다. 하지만 80년 5월 길거리에서 영문 없이 사라진 사람들에 대한 심층 보도는 한 번도 다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취재팀이 보람을 느꼈던 것은 행불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인식도 변했다는 점이다. 그동안에는 ‘보상했으면 됐다’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보도 이후 반드시 유해를 찾아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광주시는 행불자를 찾기 위해 더 많은 관심을 갖겠다고 약속 했다. 5·18민주화 운동을 연구하는 학자 중 일부는 이번 보도가 5·18 행불자 문제에 대한 분석과 기록으로서 가치가 높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유해를 찾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켰지만 취재는 끝났고 취재팀도 흩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아직도 76명의 행방불명자가 남았다.
33년 전, 아름다운 광주의 봄 날.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다 사라진 사람들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형 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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