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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호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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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1일 화요일 “America under Attack”오전 8시45분. 샤워를 마치고 나와 습관처럼 호텔 방 TV를 켰을 때 화염에 휩싸인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묵음 상태로 무덤덤하게 화면만 보면서 “미국도 민방위 훈련을 하나”라고 생각하던 나는 화면 하단 자막을 보는 순간 화들짝 놀랐다.
‘planes were hijacked before crashed.’
이때 왜 느닷없이 사무엘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떠올랐을까? 서울 뉴스센터를 연결하기 위해 호텔 전화 버튼을 연신 눌렀지만 불통. 9시3분, 월드트레이드센터 남쪽 건물에 또 한 대의 비행기가 충돌하는 모습을 본 나는 만사를 제치고 노트북을 먼저 챙겼다. 나는 호텔로부터 5블록 떨어진 UN대한민국대표부 건물로 내달렸다. 맨해튼의 아침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한승수 외교부장관 UN의장 취임식 취재를 위해 동행한 뉴욕 첫날의 아침은 그렇게 시작됐다.
오전 10시. 월드트레이드센터 남쪽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모든 통신 수단은 여전히 불통. UN대표부 건물에서 전화통을 붙들고 있기를 1시간여. 10시15분, 마침내 전화 연결 성공.
“두 대의 비행기가 월드트레이드센터에 충돌했습니다.” 전화 연결 리드를 이렇게 시작한 나는 “이번 사태는 테러로 보인다고 CNN은 보도했습니다”로 이어졌다. 첫 번째 전화 연결을 하는 중간 중간에도 나는 연신 CNN을 모니터했다. 10시29분, 두 번째 월드트레이드 센터가 주저앉았다. 이후 1시간 단위로 피해 상황 속보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속보라는 표현보다는 현지에서 매 시간 전하는 반복 리포트라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미국 언론이 전하는 내용을 중계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UN대표부로부터 호텔로 돌아와 새벽 2시까지 무려 열두 차례나 전화 연결 리포트를 반복했다. 밤이 깊을수록 맨해튼 도심을 질주하는 소방차량의 사이렌이 더욱더 크게 들렸다.
9월 12일 수요일 “한인 실종자를 찾아라”맨해튼의 아침은 조용했다. 마지막 전화 연결 이후 자는 둥 마는 둥 새벽을 지새운 뒤 오전 7시 호텔 문을 나섰다. 에디 머피를 닮은 듯한 흑인에게 월드트레이드센터로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었다. “거기 가서 뭘 하려고 그러냐? 이른 아침부터 죽을 각오하고 나왔냐?”면서 반농담조로 흑인 특유의 빠르고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계속 말했다.
렉싱턴 애브뉴에서 현장으로 연결되는 남쪽 방향으로 걷다가 옐로우 캡을 잡았다. 월드트레이드센터 앞까지 가서 현장을 본 다음, 다시 돌아오길 원한다고 하자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 택시기사는 14번가까지 내려갔다가, 도로를 가로막은 펜스를 가리키며 더 이상 못 간다고 말했다. 택시에서 내린 나는 현장 쪽으로 계속 접근했지만 열 블록쯤 내려가다 보행자 통제 라인에 막히고 말았다. 그곳에서부터는 경찰이 일일이 신분을 확인하며 해당 지역 거주민들만 들여보냈다. 외부인 출입은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현장의 구름 같은 연기가 눈에 들어왔다. 라파예트 스트리트로 좀 더 내려갔다가 하우스턴 스트리트를 통해 브리커 스트리트 역에서 6번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다.
UN의장 취임식 취재를 위해 동행했던 KBS와 MBC 취재기자들은 현지 특파원 팀에 합류해 본격적으로 현장 접근을 시도했지만 그들도 나처럼 여전히 주변을 맴돌기만 했을 뿐, 현장 접근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뉴욕시 당국은 현장에 가장 가깝게 접근 취재할 수 있는 권한을 NY1과 같은 로컬 방송사에 허용했고, 그보다 좀 더 떨어진 현장 취재를 CNN과 NBC, CBS, ABC와 같은 뉴스전문 채널과 지상파 방송사에 한해 허용했다. 신문기자들은 현장에서 한참 떨어진 구역에 머물러야 했고, 외신 기자들은 현장 주변 접근조차 불가능했다. 어떻게 취재를 해야 하나 난감해하고 있을 때 서울 데스크로부터 취재 지시가 떨어졌다.
“테러의 이유가 뭔지, 미국이 어떤 대응을 준비하고 있는지 그건 중요하지 않아. 다 여기서 커버한다. 현지에서는 무조건 한인 피해 규모, 그것만 먼저 파악해!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게 제일 중요해! 뭔 말인지 알지? 현장화면 신경 쓰지 마. 공중파처럼 카메라 기자 있어봤자 소용없어. CNN 화면이면 충분해. 명단! 실종자 명단! 빨리 확보해! 총영사관에서 서울 본부로 보고하기 전에 미리 빼내! 오케이?”
뉴욕 대표부 건물 7층과 5층 상황실을 오르내리며 피해자 명단 파악에 주력했지만 총영사관 측은 프라이버시 이유를 들며 명단 공개를 주저했다. 신경전 끝에 총영사관 관계자 수첩에 있는 4명의 명단을 빼내는 데 성공. 이후 나는 한두 명씩 실종자 명단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서울 외교부 기자실에서 철야 대기를 하고 있던 오승엽 기자에게 실종자 명단을 전달하면서 YTN은 새벽 3시 뉴스부터 명단보도에 들어갔다. 마침내 저녁 6시, 우리시각으로 13일 오전 7시, 37명의 실종자 명단을 국내 방송 사상 최초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호텔로 돌아왔을 때 시간은 새벽 2시, 하루 종일 신발을 벗지 못한 발은 퉁퉁 부어있었고 눈은 침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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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9월11일,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화염에 휩싸인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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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3일 목요일 ‘
미국, 보복을 말하다’
오전 6시 기상. 눈만 뜨면 NY1(뉴욕 원 로컬채널)을 트는 것이 습관화됐다. 사건발생 초반에는 주로 CNN을 틀었는데, NY1이 훨씬 디테일하고 팩트도 정확했다. 특히 스케치 기사를 쓰는 데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 예를 들자면 NY1은 “오늘 밤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카고’는 맨 마지막 부분을 각색해 이번 사고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내용으로 무대에 올렸습니다”하는 식으로 9·11과 연관된 다양한 보도를 했다.
사건 발생 사흘이 지난 아침까지도 현장접근은 여전히 불가능했다. 이제부터는 현장과 연계된 또 다른 현장을 찾는 방법을 찾기로 했다. 렉싱턴 애브뉴 51번가에서 지하철 E선을 타고 D선으로 갈아탄 뒤 센트럴파크에 도착했다. 센트럴파크에는 이번 사태의 희생자 임시 추모단이 마련됐다. 추도객들은 꽃과 양초, 사진들을 추모단 앞에 가지런히 놓으며 오열했다.
내게는 센트럴파크하면 오버랩 되는 두 인물이 있다. 한 명은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D.샐린저이고, 다른 한 명은 존 레논이다. ‘호밀밭의 파수꾼’ 주인공 홀든이 얼어붙은 공원 호숫가에서 ‘그 많던 여름날의 오리 떼는 다 어디로 갔을까’하고 걱정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나는 항상 ‘연민’이란 게 어떤 것인가를 느낄 수 있었다. 존 레논은 또 어떤가? 공원 내 그가 묻혀 있는 ‘스트로베리필드’에는 그가 노랫말로 평화를 염원한 ‘IMAGINE’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천국도, 종교도, 나라의 경계도 따로 없는 진정한 평화를 꿈꿨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난 테러에 대해 잘 몰라요. 무지(ignorance)는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오만(arrogance)이 죄악이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보복이라구요? 피는 피를 부를 뿐이에요. 지금은 미국이 정신을 차려야할 때에요.”
자신을 패트 다운즈라고 소개한 일흔 두 살의 할머니가 말했다.
현지 언론들은 사건 발생 이후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 ‘보복 찬성’이란 결과가 압도적으로 나왔다며 이를 헤드라인으로 보도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보복만이 능사가 아니란 주장을 펴는 경우가 예상 외로 많았다.
센트럴파크로 가던 방향의 역순으로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그만 낭패를 보고 말았다. 렉싱턴 에브뉴 53번역을 놓치고 만 것이다. 지하철 승객 인터뷰를 시도하려다가 이상한 녀석 아닌가 하는 오해만 받고 당황한 나머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만 루스벨트 섬 밑으로 통과하는 이스트 리버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맙소사!
지하철 플랫폼에는 무기를 소지한 경찰관들의 모습이 눈에 많이 뜨였다. 퇴근시간대 뉴욕의 지하철은 비좁은 통로에 출구로 나가려는 시민들로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 같은 장소를 타깃으로 또 다른 테러가 준비되고 있다면? 미국의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낳고 결국 그 피해자는 무고한 시민들이 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도널드로 저녁을 대충 때운 뒤 시내 스케치를 위해 로커펠러 광장으로 나갔다. NBC뉴스센터 전광판에 흐르는 붉은 스크롤 “부시, 우리는 21세기 첫 번째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부시의 메시지는 보복 공격이 임박했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미국은 과연 이번 사태를 제대로 풀어나가고 있는 것일까? 패트 할머니 말대로 결국 피는 피를 부를 뿐이 아닐까?
호텔로 돌아오기 전 성 베드로 성당에 들렀다. 내부로 들어서니 높은 천장 가득 현악의 선율이 맴돌고 있다. 파헬벨의 캐논을 연주하는 4명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한결 같이 검은 상복 차림이다. 기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간혹 눈에 띈다. 마치 얼굴이 해체된 피카소의 ‘우는 여인’ 같은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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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테러가 발생한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 자리인 ‘그라운드 제로’에 설치된 새 건물 ‘프리덤 타워’의 초석.(뉴욕=로이터/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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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금요일 ‘소수민족들의 불안’작은 맨해튼에는 전 세계가 들어 있다. 멜팅 포트라는 별명에 걸맞게 뉴욕 맨해튼에는 다양한 인종이 공존한다. 택시를 타고 “렛츠 고우 투…”어물거릴라치면 금방 “한국에서 오셨어요?”하는 코리안아메리칸에서부터 조르바를 닮은 그리스 주방장에 이르기까지 그 모습들이 실로 다양하다.
유엔 대표부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하라(Bukhara)라는 레스토랑이 눈에 띄길래 한동안 쳐다봤다. 전 세계인이 모여 사는 곳답게 맨해튼에는 낯선 지명을 상호로 내건 레스토랑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레스토랑 입구에 있는 이마 한가운데에 점을 찍은 여인에게 부하라가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도시가 맞느냐고 물으니, 그곳을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한다. 2년 전 실크로드를 취재할 때 이틀 동안 묵은 적이 있었다고 하니 무척 반가워하며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 칼란 미나레트에도 갔었다”
“어릴 적 그곳 주변에서 놀며 자랐다. 카라반들이 사막의 등대로 삼았던 곳이다.”
“이슬람들이 불안하겠다”
“많이 불안하다. 우리는 테러에 반대한다. 간밤에 백인들한테 공격을 당한 사람들도 있다”
테러의 여파는 글로벌 시티에 사는 소수민족들 마음 구석구석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9월 15일 토요일 ‘밀려오는 피로와 자괴감’사태 발생 닷새 만에 처음으로 9·11 현장에 접근했다. 뼈대만 남은 월드트레이드센터, 그것은 마치 자코메티의 브론즈를 보는 듯했다. 사람들은 성지 순례자인양 말없이 주변을 맴돌았다. 그 많던 벽돌과 강철과 사람들은 모두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군중 속의 침묵이 한없이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현장 주변 델리 샵으로 보이는 주인 없는 가게엔 먼지만 뽀얗게 쌓이고 있었다. 허름한 가게의 깨어진 유리창 안쪽으로 “WE’RE OPEN”이란 안내판이 을씨년스럽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정작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문 가판대에서 뉴욕 타임스 한 부를 샀다. “보이지 않는 적-먼지(Invisible enemy-Dust)”라는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 마스크를 한 행인들이 부쩍 눈에 많이 띄었다. 뉴요커들은 눈에 보이는 파괴된 도시 한가운데서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근 일주일 동안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1인 취재를 강행한 탓인지, 오전부터 몸이 으슬으슬 떨려왔다. 오한과 두통이 겹치는 것 같았다. 오후 내내 꼼짝 못하고 호텔에 눌러 앉아 수차례 전화 연결만 했다. 현지 자체 화면 없이 전화로만 연결하는 내 리포트가 시청자들에게 얼마나 비주얼하게 전달될 수 있을까? 내가 전하는 현장 곳곳의 디테일 묘사에 무덤덤하게 깔리고 있을 평면적인 CNN 화면을 생각할 때마다 착잡했다. 오디오만으로도 비디오가 느껴지는 전화연결용 워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기사를 쓸 때마다 고민했다.
“사태 발생 이후 주민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추가 테러의 위협입니다. 한인 밀집지역인 퀸즈 플러싱 지역의 경우 어젯밤 추가 테러가 있을 것이란 허위 제보로 경찰이 출동하는 사태가 있었습니다. 3500여 한인들이 모여 사는 스태튼 아일랜드의 경우 오늘 현재까지도 교통편이 두절돼 사실상 주민들의 발이 꽁꽁 묶여 있는 상태입니다. 맨해튼 현재 분위기, 이렇습니다. 곳곳의 건물과 상점, 아파트에 성조기가 내걸리기 시작했습니다. 성조기를 단 차량들도 눈에 많이 띄고 있습니다. 월스트리트 증권시장은 월요일 개장하는 것으로 최종 확정됐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최장 시간 폐장 기록입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번 주말의 풋볼게임은 취소됐습니다. 베이스볼게임 메이저리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현재까지도 TV는 일체 광고방송을 내보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니치빌리지. 세인트빈센트 병원 등 5개 병원 헌혈센터는 여전히 붐비고 있습니다. 실종자를 찾아달라는 벽보가 전신주를 비롯해 곳곳에 나붙기 시작했습니다.”
화면에 대한 아쉬움이야 어느 정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팩트였다. 특히 현장 이면의 보이지 않는 팩트들을 찾아내기란 일개 외신 기자의 입장에서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지금까지 서울로의 전화 연결 멘트의 상당 부분은 “CNN 보도에 따르면” 혹은 “로컬 채널 뉴욕1 보도에 따르면”이었다.
부끄럽게도 나는 9·11 취재에 관한 한, 미국 방송사를 구성하는 또 다른 하나의 벽돌(another brick in the wall)일 뿐이라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현장의 팩트와 그 이면을 확인 취재하는 독립된 저널리스트가 아닌, CNN의 릴레이 리포터 수준? 가치중립적 입장을 지지하는 저널리스트로서 나는 “어느 한 사람에게 테러리스트는 또 다른 사람에게 자유를 위한 투사일 수 있다”는 정의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테러리스트에게 반론권은 없다. 그렇다면 테러는 누가 규정하는가? 나의 뉴욕 9·11 취재는 가치중립적인가? 사태 발생 당일과 그 이튿날 구조된 5명 이외에 추가 생존자 소식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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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1 테러 참사 4주년인 2005년 9월 11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한 목사가 추모자들에게 설교하고 있다. (뉴욕=로이터/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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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6일 일요일 ‘Ground Zero·Ground Hero’성 베드로 성당에서 희생 소방관 추모 미사가 있는 날이다. 사태 발생 첫날 구조작업을 위해 현장에 투입됐던 소방관 3백여명이 매몰됐다. 성당 밖 도로변까지 가득 메운 인파들이 추기경의 강론을 들으며 눈시울을 붉힌다. 미사 도중 소방차가 성당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왔고, 사람들은 박수로 환영했다.
미국 사람들은 정말이지 세레모니에 능하다. 그 큰 슬픔 속에서도 감동의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미국인들에 있어서 소방관은 말 그대로 불과 싸우는 사람, 단어 그대로 ‘firefighter’들이다. 타워링이나 백 드래프트 등 영화를 통해 느낀 것이지만 소방관들은 희생의 상징적 존재들이고 바로 그 타인에 대한 희생을 대단한 가치로 여기는 아메리카니즘의 전형이다.
미사를 집전한 에드워드 추기경은 WTC 현장은 ‘Ground Zero’가 아니라 ‘Ground Hero’라고 표현했다. 히어로? 영웅? 미국의 영웅 만들기는 그러나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 발발 시 “돌격 앞으로!” 명령에 적진으로 뛰어드는 것은 용기인가, 애국심인가, 의무인가 아니면 광기인가?
9월 17일 일요일 ‘일상으로의 복귀’뉴욕 월가 정상화, 증권거래소 9시30분부터 영업 개시, 초반 주가 폭락세, 베이스볼 게임 재개, 맨해튼은 증권시장 개장을 시점으로 일단 사고 현장을 제외하고는 정상화 단계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예전처럼 ‘DON’T WALK’ 빨간 교통신호를 무시한 채 바삐 횡단보도를 건넜다. “DON’T WALK means RUN!”이라며 익살을 떨던 9·11 현장에서 만났던 CBS의 한 기자가 생각났다. 뉴요커들은 다시 바쁘게 움직였고 맨해튼은 참사 일주일 만에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사건 발생 하루 전날, 저녁 무렵 맨해튼 어느 한 귀퉁이에서 듣는 엘라 피츠제럴드의 ‘뉴욕의 가을(autumn in new york)’은 로맨틱했다. 그러나 그 여유작작함 뒤로 기습해 오는, 예정된 가을의 허리춤을 파고든 계절은 복병의 창끝 같은 인디언썸머였으니…. 뉴욕의 가을은 뜨거웠고 나는 그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한 마리 고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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