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2진 자격 중앙청 출입시절

방송사 영향력 작다 '괄시'

공종원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내근에서 다시 외근을 나갔다. 이번에는 중앙청 출입이다. 그 옛날의 일제총독부 건물이다. 그 건물의 1층 동남쪽 끝에 있는 방이 기자실이었다.

기자실엔 국내의 종합일간지와 통신 그리고 방송기자 30명 정도가 출입했다. 서울의 주요 일간지나 통신의 경우는 두 명씩, 방송과 한두 군데뿐인 지방지는 한 명씩 출입하는 것이 관례였다. 나는 김집 선배를 따라 2진으로 그곳에 나갔다. 김 선배는 다년간 판문점 출입도 겸해 북측 보도요원들과 얼굴이 익어 늘 농담과 입씨름을 주고받을 정도였기에 뒤에 이수근의 귀순을 특종 보도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당시 여느 기자실과 마찬가지로 한가운데 테이블에선 포커판이 벌어지곤 했다. 당시는 아직 화투로 하는 고스톱이 개발되지 않아 섰다를 하기도 했다. 나는 애당초 돈도 없고 노름에 취미도 없어서 여기에 끼일 형편도 아니었다. 중앙청 기자들은 대개 총리실과 총무처, 법제처, 공보처 기사를 커버해야했고 외무부까지 체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외무부를 빼면 큰 기사가 자주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다지 긴장해야 하는 곳은 아니었다. 거기다 나는 중후한 석조건물인 중앙청의 분위기를 좋아했고 가끔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마련해주는 영화시사회도 즐겼다. 당시 새로 수입되는 외국영화는 공보처 허가를 받아야했기 때문에 출입기자들은 극장상영에 앞서 삭제되지 않은 장면까지 볼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중앙청 기자실에서 가끔 달갑지 않은 분위기 때문에 기분이 편치 않았다. 어쩌다 기자들이 총회를 하는데 정회원만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송은 두 명이 출입해도 1진만 인정한다는 기왕의 규약이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기자이면서 사람을 차별하는 관례가 지켜지던 시절이었다. 내가 더욱 소외감을 느꼈던 것은 대학동기나 후배들은 신문이나 통신 소속이라고 자격이 되고, 나는 방송 소속이라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지방지 소속의 안병규 형(후에 국회의원도 했다)이 내 사정은 모르고 “동료로서 그럴 수 있는 거냐”며 나에게 불평하는 것이다. 나는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았지만 안형은 아마 내가 대우받는 기자 속에 들어가고도 자신을 배려하지 않는다고 오해한 것이란 생각을 하며 실소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곤혹스러웠던 것은 장관실이나 처장실 책상에붙어있는 출입기자에 내 사진이나 이름이 게재되지 않았던 점이다. 그 때문에 함께 취재를 해도 취재원으로부터 대신 나온 기자처럼 취급받는 것이 못내 서글펐다. 그런 제약 때문에 단독취재가 어려웠던 것은 물론이다. 나는 물론 김집 선배의 배려로 정일권 총리의 지방출장에 따라가는 등 혜택도 누렸다. 하지만 커다란 특종을 해서 기자로서 보람을 느낄 기회는 얻을 수 없다는 한계를 통감해야 했다.

이렇게 방송기자가 괄시받은 것은 당시 기자사회의 관행이다시피 했다. 방송매체가 아직 생긴지 얼마 안되는데다가 당시는 문화, 동아, 동양 등 세 군데 민간라디오의 보도가 아직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TV의 보급이 지지부진했던 때문이었다.

하지만 방송의 위력이 조금씩 발휘되기 시작하면서 곧 출입처를 비롯해 사회적 인식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변한 것은 사회부, 특히 사건보도 분야라고 생각된다. 매시간 뉴스를 내보내야하는 방송기자들이 출입처의 구석구석을 부지런히 뒤지기 시작하면서 사건이 방송으로 알려지는 빈도가 높아지고 신문기자들이 방송기자의 취재내용을 넘겨받는 일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경찰서 등 사회부처의 기자실은 대개 신문, 방송기자들이 함께 사용하게 되고 이어 정치부서 그리고 경제부처의 순서로 달라졌다. 경제부처의 경우는 가장 늦게까지 신문기자실, 방송기자실, 전문기자실로 삼분되는 것이 관례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세태풍경이다. 요즘 같으면 TV의 영향력이 웬만한 신문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30년 전 당시의 사정은 전혀 지금과 달랐던 것이다.

어떻든 나는 중앙청을 드나들면서 경찰출입과는 또 다른 정치부처의 모습을 체험했다. 장관 차관 혹은 처장 같은 이들을 가까이 만날 수 있었다는 것도 큰 변화였다. 나는 하루에 한번 꼴로 법제처 법제관실들과 총리실, 공보관실에 들르곤 했다. 나는 당시 중앙의 심상기 김한도, 한국의 이수정, 염길정 그리고 대한의 신경식, 김한수와 조선의 주돈식형 등이 기자실 뺑둘러 있던 전자식 전화통을 붙들고 기사를 불러대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특히 작은 기사감도 빼지 않고 챙기던 합동통신의 한건석형의 성실함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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