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문화 비판 칼럼에 분개…대로변서 칼부림 '보복'

기자와 필화 <4> 중앙경제신문 오홍근 부장 테러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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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에 불만을 품은 육군정보사 요원으로부터 피습,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 중인 오홍근 당시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 (오홍근씨 제공)  
 
정보사 준장 등 군 장성 개입 밝혀졌으나
고등군사법원은 항소심서 선고유예 판결


“오홍근씨, 오홍근씨.” 아까부터 그를 따라왔던 트레이닝복을 입은 청년 2명이 불렀다. 머리 뒤꼭지부터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던 그는 불길한 생각에 “나, 오홍근 아닌데요”라고 말했다. 한 청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 청년은 “대공에서 나왔는데 같이 가야겠다”며 팔을 붙잡았다. 그는 팔을 뿌리치려고 버둥거리면서 신분증 제시를 요구했다. 때마침 출근하던 아파트 경비원이 그를 보고 뛰어왔다. 순간 한 청년의 주먹이 그의 코와 윗입술 사이의 인중을 강타했고 그는 쓰러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병실이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어머니와 몇몇 지인들이 이상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연방 눈물을 흘리셨고, 지인들은 ‘그 정도이길 다행이다’라며 혀를 찼다. 아침에 있었던 일이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그런데 다리가 왜 이렇게 묵직하지.’ 자세히 보니 왼쪽 허벅지에서 발등에 이르기까지 두툼한 붕대로 감겨 있었다. 의사는 왼쪽 허벅지에 칼로 깊이 3㎝, 길이 30㎝가량 찔렸으며 모두 35바늘을 꿰맸다고 했다. 맞은 기억은 선명한데 칼에 찔린 기억은 나지 않았다.

1988년 8월6일은 당시 오홍근 중앙경제신문(중앙일보 자매지) 사회부장에게 악몽의 날이었다. 그는 이날 아침 7시30분쯤 출근하기 위해 서울 강남구 청담동 삼익아파트 집을 나서다 집앞 영동대로변에서 괴청년 3명에게 흉기로 허벅지를 찔리는 테러를 당했다.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택시를 타려고 큰길가로 발길을 재촉하는데 갑자기 등골이 써늘해졌어요. 뒤를 흘끗 보니까 누군가가 따라붙었어요. 얼마나 무섭고 두렵던지…. 경찰에서 몽타주를 그리겠다고 가해자들의 인상착의를 말하라는데 하나도 생각나지 않더군요.” 오홍근은 말했다.

‘서울1라3406호 포니2’
그날 악몽의 전조는 진작부터 보였다. ‘월간중앙’에 ‘오홍근이 본 사회’라는 칼럼을 게재한 그해 4월말부터 “그렇게밖에 못 쓰겠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아. 이 나라를 지킨 게 누군데…” 등의 협박전화가 회사와 집으로 여러 차례 걸려왔다. 특히 8월호에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란 글을 쓴 뒤 회사로 항의편지가 오고 테러 1주일 전부터는 그의 주소와 신원을 확인하는 전화가 집으로 걸려오기도 했다.



   
 
  ▲ 평민당 조사단 의원들이 입원 중인 오홍근 부장을 찾아 사건 경위에 대해 듣고 있다. (오홍근씨 제공)  
 
경찰은 기사 내용에 불만을 품은 자들에 의한 청부폭행일 것으로 보고 수사를 폈고, 이 과정에서 아파트 경비원 이명식씨 등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 범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차량이 군부대 소속임을 밝혀냈다. 삼익아파트 경비원이었던 이씨는 사건 당일인 6일 오전 5시50분쯤 13동 끝 주차장에 수상한 차가 있으니 가보라는 동료 경비원의 말을 듣고 현장을 답사, 경비일지에 승용차 번호 ‘서울 1라3406호 포니2 쑥색’이라고 적었다. 차적 조회결과 그 차량은 육군 정보사령부 소속 차량으로 밝혀졌고, 이에 따라 군인들의 테러 가능성이 제기됐다.

하지만 군은 그 차량이 정보사 소속인 것을 인정하면서도 사건이 나기 이틀 전인 4일 이후 이 승용차를 운행한 사실이 없다고 경찰에 통보했다. 또 경비원 이씨 등 목격자들은 문제의 군 정보사 소속 차량 대질 조사에서 차량 번호와 차종은 동일하지만 차 색깔과 번호판 크기, 차 내부 시설 등에 다소 차이가 있다고 진술했다. 이씨는 당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대질 때의 3406호는 우선 색이 은백색이었고 사건당일과는 달리 색깔이 깨끗했으며 번호판도 선명했다. 또 전에 없던 윈도브러시와 스피커가 달려있었다. 그래서 내가 본 차가 아니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날은 수상한 생각이 들어 차량 50㎝까지 접근, 쭈그려 앉아 수차례 확인한 뒤 메모했기 때문에 내가 목격한 차가 서울1라 3406호 포니2가 틀림없다”고 말했다.

익명의 전화제보로 수사 급반전
범행차가 변조된 것으로 추정됐지만 경찰이 미적거리고 군이 무관함을 주장하면서 수사는 답보상태에 빠졌다. 자칫 미궁에 빠질 뻔했던 이 사건은 발생 17일 뒤인 8월23일 익명의 제보자가 중앙일보에 전화를 해 범인들의 인적사항을 알려주면서 새 국면을 맞았다. 한 제보자는 “육군 5616부대 휘하의 한 파견부대원 4명의 사건당일 행적에 의심이 간다”며 이들 4명의 인적사항을 알려줬다. 이튿날 이 제보내용이 국방부에 전달되고부터 수사가 급진전됐다. 육군범죄수사단은 제보에 따라 육군정보사 박철수 소령과 김웅집 이우일 남정성 하사 등 4명을 연행, 당일 행적 등을 추궁해 이들에게 범행사실을 자백받았다.

수사단은 이들의 범행동기에 대해 “오홍근 부장이 복간된 월간중앙 4월호부터 연재해 온 ‘오홍근이 본 사회’ 칼럼이 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두드러져 불만을 품어오다 특히 8월호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란 칼럼에서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가 군사문화의 병폐에서 기인했다’고 지적한 데 흥분, 부대원들끼리 ‘한번 혼을 내주자’며 범행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들은 사전에 5차례에 걸쳐 현장답사를 하고 오홍근의 가족사항과 아파트 평면도까지 연구하는 등 철저한 준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 오홍근 부장이 테러를 당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아파트 앞. (중앙일보 제공)  
 
88년 늦여름 정국은 5공 청산 문제로 뜨거웠다. 그해 2월 출범한 노태우 정부는 4월 13대 총선에서 패하면서 정국 주도권을 야당에 넘겨줬다. 당시 평민당 등 야권은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을 헌정사상 처음으로 부결시키면서 정권을 압박해 국회 5공비리조사특위, 광주특위 구성을 관철시켰다. 양 특위가 5공화국 당시 저질러졌던 야만적인 행위들에 대한 조사에 착수하면서 5공 적폐가 노출되고 한편으로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얼마 남겨두지 않으면서 사회 전반에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 오홍근 테러사건은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군이 정치에서 배제되고 있는 데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온 군부의 테러였다. 오홍근은 칼럼에서 이 땅에 군사정권이 등장하면서 생겨난 군사문화가 정치와 국회는 물론 사법부, 교육현장(대학)에 이르기까지 미치는 해악을 지적했고 그의 날카로운 시각은 일부 정치군인들의 반발을 사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정보사령관 사건 보고받고도 묵인
국방부가 수사 결과를 발표했지만 사건은 종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의혹은 커져만 갔다. 축소 수사에 대한 비판과 함께 ‘범행 현장에 3~4명이 더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 거기에 장성급이 연루된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의혹은 일파만파로 확산됐다. 또 평민당 등 정치권에서 국방위를 소집해 국정조사권 발동을 거론하며 문제를 삼자 국방부는 정보사령관을 소환조사하는 등 수사를 확대했다. 결국 국방부는 8월30일 장성급 현역 군인 2명이 개입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테러였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국방부 발표에 따르면 육군정보사령부 예하부대장 이규홍 준장은 오홍근의 월간중앙 8월호 칼럼에 분개해 7월22일 부하 박철수 소령에게 ‘오 부장을 혼내주라’고 지시했고, 박 소령은 부하인 안선호 대위, 남정성 김웅집 이우일 하사 등 4명의 행동대원을 동원해 사전 답사를 거쳐 구체적인 범행계획을 수립했다.

박 소령은 8월2일 이 준장에게 범행계획을 보고한 뒤 4일 하사 3명에게 소속부대에서 사용하는 길이 25㎝의 칼을 나누어 주고 ‘죽이지는 말고 혼만 내라’고 지시했다. 범행 당일인 8월6일 안 대위는 하사 3명과 함께 오전 6시쯤 서울1라 3406호 포니2 승용차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고, 박 소령은 오전 7시쯤 서울1거 6873호 포니엑셀 승용차를 타고 현장에 합류해 오 부장을 테러했다. 이 준장은 범행 이틀 후인 8월8일 사령부 참모장 권기대 준장에게 관련 사실을 통보했고, 권 준장은 목격자들이 진술한 ‘서울1라 3406호 포니2’ 운행일지를 변조하도록 지시하는 등 증거 인멸을 시도했다. 육군정보사령관 이진백 소장은 범행 발생 5일 후인 11일 이 준장과 권 준장으로부터 사건전모를 보고받고도 묵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는 이규홍 준장과 박철수 소령, 안선호 대위와 3명의 하사는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행위 위반 혐의로, 권대기 준장은 증거인멸 혐의로 각각 구속하고 이 사령관은 직위해제했다. 그러나 사건이 육군 보통군사법원 검찰부로 넘어간 뒤 구속기소돼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범행을 지시한 이 준장과 박 소령, 행동책 안 대위 등 3명뿐이었다. 범행을 직접 저지른 3명의 하사관은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는 이유로 기소유예로 풀려났으며 이진백 정보사령관과 권대기 준장은 지휘책임을 물어 예편조치됐다.

중앙노조 “선고유예는 반역사적 행위”
그해 9월29일 열린 첫 공판에서 이 준장과 박 소령에게 각각 징역 3년, 안 대위에게 징역 2년이 구형됐다. 그러나 그해 10월10일 육군보통군사법원 심판부는 이 준장과 박 소령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안 대위에게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죄질로 봐서는 엄중 처벌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범행 동기가 개인에 사리사욕이나 이기심에서가 아니라 군을 아끼는 충정에서 비롯됐고 피해자의 피해 정도가 가볍기 때문에 이를 참작해 집행유예와 선고유예 판결을 내린다”고 밝혔다.

가해자를 옹호하는 듯한 판결이 나오자 당시 언론계를 비롯한 각계에서 비판 여론이 빗발쳤다. 중앙일보 노조는 성명에서 “군의 명예가 실추될 것조차 판단하지 못한 일부 군인의 범죄행위를 두둔하는 것은 제2, 제3의 반역사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계획적인 의도”라고 했고, 민주변호사회는 “군법회의가 피해 정도를 경미하다고 판단하는가하면 언론에 대한 군의 제재 필요성과 범행 관련자들의 범행동기를 인정하고 격려하는 뜻까지 표시하고 있는 것은 언론에 대한 제2의 테러행위”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 판결마저 가벼웠던지 고등군사법원은 그해 12월28일에 열린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이 준장과 박 소령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고, 안 대위에 대한 검찰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리고 이 판결은 1989년 1월12일자로 확정됐다. 오홍근은 “5·16 이후 박정희씨와 전두환씨로 대표되는 일부 정치군인들이 이 땅에 깔아놓은 군사문화의 폐해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면서 “가해자들은 당시 군이 핍박당하고 있어 의분해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으나 분명히 정보사 또는 정보사 이상에서 결재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참고자료>
△중앙일보 30년사
△MBC NEWS 20년 뉴스보기
△기자협회보 506호, 507호, 509호
△중앙일보 1988년 8월8일 13면 ‘중앙경제 사회부장 출근길 피습’ 8월25일 1면 ‘오부장 테러 용의자 4명 검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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