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 그 '미친 사건'의 전주 될 줄 몰랐다"

기자와 필화 (1)한수산 필화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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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수산 필화사건에 연루된 기자들이 끌려가 고문을 당한 서빙고동 보안사 대공분실 터. 윤석양 이병이 1990년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뒤 전국적인 규탄 대회가 이어지면서 정부는 보안사 서빙고 분실을 그 해 말 폐쇄했다. (사진=동아일보 제공)  
 
전두환 정권, 중앙 ‘욕망의 거리’ 문제 삼아 정규웅 기자 등 7명 서빙고 분실서 3박4일 고문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 1981년 5월28일 오후 3시, 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전화기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문화부 편집위원 정규웅은 전화기를 들었다. “중앙일보 문화부입니다.” 잠시 후, 저음톤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정규웅 부장이시죠. 보안사령부 아무개 소령입니다. 한수산씨의 제주 집주소와 전화번호를 알려 주시겠습니까.” 보안사라는 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바로 전 해인 1980년 광주학살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폭압정치를 휘두르고 있었고, 그 전위에 보안사령부가 있었다. 보안사에서 한수산을 찾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날 걸려온 보안사의 전화 한통이 그 ‘미친 사건’의 전주가 될지는 알지 못했다.

보안사 전화 한통에 편집국 술렁
이튿날인 1981년 5월29일 오전 11시. 손기상 편집국장 대리 겸 문화부장에게 ‘문화부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누구냐’고 묻는 전화가 보안사에서 다시 걸려왔다. 회사는 벌통을 쑤신 듯 소란스러웠다. ‘별일이야 있겠어’라고 생각하며 불안을 떨치면서 그는 회사 간부들과 함께 한수산이 중앙일보에 연재 중이던 소설 ‘욕망의 거리’를 검토했다. 이윽고 문제가 될 만한 대목 2곳을 발견했다.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하는 경우, 그 관리는 돌아가는 차 속에서면 다 잊을 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보고 들어주는 게 황공스럽기만 해서, 그 관리가 내미는 손을 잡고 수줍게 웃는 얼굴, 바로 그 얼굴들은 언제나 그렇게 닮아 있어서….”(1981년 5월14일자)

“월남전 참전 용사라는 걸 언제나 황금빛 훈장처럼 자랑하며 사는 수위는 키가 크고 건장했다. (중략) 세상에 남자 놈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1981년 5월22일자)

“소설의 일부 내용이 문제가 됐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확신할 순 없었어요. 보안사에 끌려간 누구도 무슨 이유로 ‘그 사건’에 연루됐는지 알지 못했으니까.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언감생심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건 자체가 파묻혀 버렸죠.” 정규웅은 말했다. 사람들은 그 사건을 ‘한수산 필화사건’이라고 했다. 한수산이 중앙일보에 쓴 ‘욕망의 거리’ 내용 일부가 문제가 돼 작가 한수산과 시인 박정만, 소설 게재에 관계된 기자들이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 한수산 필화사건에 대한 중앙일보의 2007년 10월26일자 보도.  
 

과거사위, 26년 만에 실체 밝혀

사건의 정확한 원인이 밝혀진 것은 2007년 10월이었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그해 10월25일 발표한 ‘신군부의 언론통제사건 조사결과 보고서’에서 ‘한수산 필화사건’과 관련한 보안사의 관련 문건을 기무사령부(옛 보안사령부)에서 찾아냈다. 문건 등에 따르면 중앙일보 1981년 5월14일자, 5월22일자 소설이 정권의 심기를 건드렸다. 정규웅이 마음에 걸렸다고 생각했던 소설 대목과 일치한다.

과거사위에 따르면 당시 보안사령부(사령관 노태우)는 ‘각하(전두환)의 탄광촌 순방을 비유하면서 무슨 건의를 하든 간에 돌아가는 차 속에서 모두 잊어버린다는 불신감 조성의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군(경)·민간을 은연중 이간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판단하고 소설가 한수산, 손기상 중앙일보 편집국장 대리 겸 문화부장, 정규웅 편집위원, 권영빈 출판부장, 이근성 출판부 기자, 허 술 전 출판부 기자, 시인 박정만 등 7명을 연행했다. 연행된 곳은 서울 서빙고동 보안사 대공분실의 지하조사실이었다.

지하실의 지옥같은 고문
정규웅은 1981년 5월30일, 검정 양복을 입은 요원 2명에게 서빙고 분실로 연행됐다. 요원들은 정규웅의 몸을 발가벗겨 구둣발로 짓밟고, 몽둥이로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다음으로 끌려간 곳은 고문실. 빨간 전구가 천장에 달려 있는 어두컴컴한 방에서 ‘책 한권으로도 다 못 쓰는’ 갖가지 고문을 당하며 심문을 받았다. 양 장딴지 사이에 각목을 집어넣고 무릎을 짓이기는 고문, 의자에 앉혀 사지를 꽁꽁 묶고 얼굴에 타월을 덮어 씌운 뒤 고춧가루 물을 쏟아 붓는 고문, 전기가 통하는 의자에 앉혀 놓고 열손가락에 전깃줄을 연결시킨 뒤 스위치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고문, 두팔을 허공에 있는 밧줄에 동여매고 몸이 뜨게 한 뒤 좌우로 흔들어 각목 세례를 퍼붓는 고문….

보안사는 정규웅에게 한수산의 배후인물이 아니냐는 식으로 다그쳤다. “한수산이와 죽이 맞아가지고 정부 욕들 해대다가 소설로나 한번 맛을 보여주자고 합의한 거지. 네가 한수산이한테 소설을 그렇게 쓰라고 조정했지”라고 추궁했다. 연재소설의 필자를 한수산으로 선정한 죄(?)밖에 없는 그로서는 어이없는 수사였다.

권영빈, 이근성도 비슷한 시간에 끌려왔다. “오월의 불볕이 쨍쨍 내리쬐는 대낮이었어요. 조그만 마당 같은 곳에 내렸는데, 그 순간부터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때리더군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가담해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에서 고문을 당한 전력이 있던 이근성도 보안사의 고문에 치를 떨었다. 보안사는 이근성에게 “작가는 모름지기 권력을 비판해야 한다는 말을 한수산에게 했지”라고 추궁하며 구타와 욕설을 되풀이했다. 이근성은 소설 ‘욕망의 거리’ 연재가 끝난 뒤 단행본을 내는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 한수산을 한 번 만났을 뿐 그와는 생면부지였다.

“나를 죽인 것은 5월의 그날”
정규웅 등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발견할 수 없었던 보안사는 3박4일이 지난 후 그들을 풀어줬다. 이근성은 정규웅을 등에 업고 서빙고 분실을 나왔다. 당시 20대 후반이던 이근성은 그들 가운데 그나마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정규웅 부장을 업고 중앙일보로 왔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어요. 얼굴만 빼놓고 온몸이 검붉게 죽어있는데, 사람의 몸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이근성은 말했다.

그해 5월, 아무런 이유 없이 끌려가 죽도록 두들겨 맞은 데 대한 분노는 삭여지지 않았다. 고문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도 매년 5월이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시인 박정만은 ‘저 쓰라린 세월’이란 시집의 후기에서 “나를 죽인 것은 5월의 그날이다”고 분노했다. 그 사건은 멀쩡하던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폐인으로 만들었다. 시인 김소월의 계보를 이어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던 박정만은 그 사건이 빌미가 돼 술과 방황으로 일관하다 1988년 10월 세상을 떠났다. 한수산은 보안사령관이었던 노태우가 1988년 대통령에 취임한 뒤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이주했다가 1992년께 귀국했다. 정규웅, 허 술은 아직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고 손기상, 권영빈, 이근성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길 꺼린다.

그해 5월, 7명의 사람을 개 끌듯이 끌고 가 개 패듯이 때리며 보안사가 얻어내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정규웅은 “새 정부와 군사정치의 막강한 힘을 과시해 보자는 의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리들은 그들이 보여 주고자 한 ‘본때’의 희생자였다”고 말했다. 이근성은 “언론계, 문화계, 학계 등에서 일고 있었던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견제하려고 했던 것 같다.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고문을 가한 것으로 미뤄 우리를 본보기로 다른 사람들을 겁주려는 시도였다”고 말했다.

“여긴 한강이 가까워. 여기서 죽으면 시체가 한강으로 가게 돼 있어. 흔적이 안 남는다 말이야.” ‘죽음의 집’에서 풀려나던 그해 6월 첫날, 보안사 중령이 고문 받은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며 던진 말은 27년이 지난 지금도 이근성의 귀에 뚜렷이 남아 있다. 김성후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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