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역사-한·미 FTA 협상이 없다면?


   
 
  ▲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왜 그 역사가 존재한다고 믿지?” 79년 늦가을. 현재 미국에서 꽤 유명한 경제학자가 된 한 친구의 질문과 함께 낙엽이 툭 떨어졌다. 재수를 해서 1년 늦게 들어온 그에게, 정학 상태의 내 처지를 열심히 설명하는 중에 튀어 나온, 그 때도 말문이 막혔고 지금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인 질문이다.

존재까지 의심하지 않는다 해도 역사, 또는 그 해석은 어렵다. 두루뭉수리로 말해서 “한일합방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가 성장했는가?(민족사관)”, 아니면 “한일합방 ‘때문에’ 우리 경제가 성장했는가(근대화론)”라는 초보적 질문조차 변주를 거듭하면서 여전히 논란거리다. ‘불구하고’에는 역사의 가정이 들어 있고 ‘때문에’ 쪽은 인과관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쳇바퀴가 지겨운 회의론자들은 역사란 그저 사실을 기록해서 낟가리처럼 쌓아두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에도 불구하고’와 ‘때문에’는 미래의 가정으로도 마주 설 수 있다. 6개월여의 논쟁 속에서 이제 형이상학의 경지에 이른 정부의 한·미 FTA 추진이 그렇다. “하면 안된다고 말할 것이 아니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라”는 최신판 주장을 보라. 뭔가 지금 ‘특단의 대책’을 내 놓지 않으면 곧 나라가 망할 것 같다는 강박의 애국심(대통령의 ‘소신과 양심’)은 이해가 가지만 그저 미래에 대한 가정과 믿음일 뿐이다.

당장 한·미 FTA 협상이 없다면? 3년간이나 준비한 ‘약값 적정화 정책’은 벌써 입법이 되어 시행됐을 것이다. 미국의 거대 제약회사들이 아우성을 치겠지만 그저 통상현안일 뿐이다. 스크린쿼터 문제가 99년부터 지속된 통상현안이라지만 지난 7년간 나라 망할 일이 벌어졌는가?

쇠고기는 광우병의 우려가 사라지지 않는 한(적어도 미국이 영국처럼 3단계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수입하지 않는다는 농수산부의 방침이 변했을리도 없다. 우리 자동차의 배기 가스기준을 GM이나 크라이슬러가 문제삼는다 해도, 경쟁력으로 안 되니까 남의 나라 환경정책까지 건드린다는 조롱을 받았을 것이다. 주먹구구로 계산해도 수 조원을 훌쩍 넘는 손해를 가져올 ‘4대 선결요건’은 잊을만하면 쿡쿡 쑤시는 ‘사랑니’ 같은 존재에 머물렀을 것이 틀림없다.

뿐만 아니다. 시골 우체국에도 자랑스럽게 내건 “세계적 특송”이라는 펼침막을 힘없이 내려야 하는지 걱정해야 할 일도, 어쩌면 코스타리카처럼 건강보험마저 없어져 그 값비싼 미국식 민간보험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우려도, 혹시 볼리비아처럼 수도가 미국회사에 팔릴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멕시코처럼 시골로 가는 철도가 끊길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재경부가 모든 공공서비스의 민영화를 꿍꿍이로,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데 그쳤을 것이다.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전·현직 부총리가 일제히 나서서 “바로 그 때문에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한다”고 한 것도 그 협상이 진행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극단의 상상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위의 우려를 한·미 FTA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일까?

도대체 이라크 파병, 전략적 유연성 합의, 한·미 FTA 추진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대미 퍼주기’의 결과로 결국 우리가 미국의 품에 완전히 안겼고, 따라서 이제 우리가 뭘 할 수 있는 여지가 지극히 좁아졌다는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핵사태가 악화된 것이라고 정부는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 바로 ‘그 때문에’, 제 풀에 제 속까지 모두 다 내놓기 때문에 미국은 기꺼이 북핵사태를 즐기면서 제 갈 길로 가는 것이 아닐까? 과거에 아무리 안락했다 해도 다 큰 아이가 자궁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이미 거기에 자궁은 없다. 다만 패권다툼의 아수라장이 있을 뿐이다.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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