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위협'을 감당해야 하는 시대
1988년 7월, 노태우 대통령은 정기승 전 대법관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우리 국회는 이 임명에 동의하지 않았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부결된 순간이었다. 그가 유신정권 및 제5공화국 아래 보여준 군사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가 문제가 되었다.정기승 전 대법관 지명은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는데, 지명 한 달 전인 6월에 민주적인 사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소장법관들의 서명운동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민사지법의 법관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 열기의 와중에서도 사법부가 아무런 자기반성의 몸짓을 보여주지 못했
언론, 판세분석을 멈춰라!
22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다가온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표정은 2년 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 때와 유사하다. 이번에도 비호감이라는 꼬리표가 붙었기 때문이다. 예견됐던 대로 엉망이다. 김건희 (여사님) 특검법 논란 이후 건생구팽 평가를 받는 국민의힘 공천 상황이 그렇다. 더불어민주당도 다르지 않다. 자객공천, 비명횡사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양당 모두 시스템 공천임을 강조했는데, 공천 결과를 보라! 이 정도면 그 시스템은 고장 난 게 틀림없다.국민의힘은 시스템을 통해 공천받은 도태우(대구 중남구), 정우택(충북 청주상당), 장
성평등 의제 확산을 위한 언론의 역할
3월8일 여성의 날을 맞아 여러 관련 보도가 있었다. 각종 행사와 성차별 철폐를 위한 여성 단체의 집회시위에 대한 스트레이트 기사가 가장 많았고, 한국의 저출생 문제에 대한 진단과 제언, 그리고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진입한 이후 한 번도 꼴찌를 벗어난 적이 없는 유리천장 지수 등이 주요 보도 아이템이 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젠더 권력 관계에 따른 여러 문제가 상존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념일 혹은 특정 사회적 사건을 중심으로 관련 의제를 환기하는 것은 언론의 중요한 책무 중 하나일 것이다.아쉬운 점은 여전히 성평등 관련 의제가…
인스타그램 피드는 뉴스일까?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저녁 9시 뉴스 마지막 일기 예보가 끝나면 텔레비전을 끄고 주무셨다. 할아버지 옆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던 나에게 뉴스란 하루를 정리하고 저녁 시간에 텔레비전을 통해 보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어린 시절의 나처럼 뉴스를 보는 사람이 있겠지만, 오늘날 뉴스를 이용하는 방식은 훨씬 다양해지고 있다. 작년 말 퓨리서치 센터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인스타그램을 통해 뉴스를 본다고 응답한 사람이 16%였다. 페이스북(30%)이나 유튜브(26%)에 비하면 낮은 비율이지만, 어떤 사람은 인스타그램은 사진이나 보는 서비스인데…
참을 수 없는 직관의 유혹과 직업의식
위르겐 클린스만 한국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이 논란 끝에 경질되었다. 감독으로서의 자질은 실망스럽지만, 그는 여전히 위대한 축구선수다. 선수 시절부터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었던 클린스만은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독일국가대표팀 소속으로 출전해 잠비아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달성했다. 1994년 미국월드컵 당시 조별리그 3차전 한국과의 경기에서는 전반 시작 12분 만에 대여섯 명의 한국 수비수들이 페널티 박스에 포진해 있는데도 묘기에 가까운 멋진 터닝 발리슛을 작렬시켰다. 이것을 시작으로 독일은 전반에만 3골을 몰아넣었고, 그 중 2골을…
반복되는 폴리널리스트 문제, 정말 해결책 없나?
선거를 앞두고 어김없이 폴리널리스트 논란이 벌어졌다. 제법 알려진 언론인 여럿이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으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이미 익숙한 풍경이기 때문인지, 그렇게 큰 화제가 되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덤덤하게 넘어가도 되는 걸까?공직선거법은 정식으로 등록된 언론사에서 편집, 제작, 취재, 보도 업무를 하던 언론인의 출마를 공직자와 같이 규제한다. 지역구 후보가 되려면 선거일 90일 전까지, 비례대표 후보가 되려면 30일 전까지 현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이 규제는 원래 공무원과 공공기관 고위직이 대상이다. 그런데…
정책적 전환기에 역할을 하지 못한 언론
5년여 전에 기자를 그만둔 이후에 사회 정책을 공부하면서 2015년 7월에 기초생활보장제도를 기존 단일급여체계에서 맞춤형 급여체계로 전환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남은희박윤영김우현의 연구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개정과정 연구: 맞춤형급여를 중심으로(2021)를 보면 맞춤형 급여체계로의 개편이 박근혜 정부의 공약이었고, 제도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송파 세 모녀 사건이었다고 한다.왜 기자 때 이토록 중요한 제도적 전환을 알지 못했을까. 송파 세 모녀 사건은 기억하면서 대안으로 제시된 제도는 왜 인지하지도 못한 걸까. 변명하자면 20
취재는 퍼즐 맞추기가 아니다
발달장애자녀가 특수교사에게 정서적 학대를 당했다. 부모는 특수교사를 아동학대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이후 부모가 증거 수집을 위해 자녀의 가방에 녹음기를 넣어서 수업 내용을 몰래 녹음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교권 침해 논란이 일었다. 법정에선 2시간 40분에 달하는 녹음파일이 전체 재생됐다. 수업시간을 녹음했다던 파일 대부분은 무음이었고, 기소된 사건 관련한 내용은 전체 다 합해 5분 남짓했다.한 장애부모는 장시간 무음에 대해 지적하며 제대로 된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분노했다. 그러나 한 특수교사는 그 시간을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권력의 언론 분할통치와 방심위
자유당 계열 정당의 집권체제에서는 기존 제도를 활용하여 비교적 손쉽게 장악할 수 있는 공영매체와 정치경제적 거래를 통해 포섭할 수 있는 기타 언론을 구분하고, 자원의 불균등한 배분을 통해 성장시킬 우호적 언론과 약화시킬 비우호적 언론을 철저히 갈라 분할통치하는 전략을 세워 일말의 주저도 없이 실천에 옮겼다.한국언론정보학회 소속 5인의 언론학자가 2022년에 출간한 언론 자유의 역설과 저널리즘의 딜레마에 나오는 구절이다(26쪽). 여기서 언급된 집권체제가 활용하는 기존 제도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다.이
'괴물은 누구게' 놀이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저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괴물(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을 본 한 지인의 첫 마디는 이랬다. 다수의 영화 평론가는 감독과 작가가 이 영화를 3부로 기획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고 말한다. 1부와 2부에서 괴물을 찾는 데에 몰두하던 관객들(괴물이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이 3부를 통해 자신의 편견(선입견고정관념)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드는 영리한 구성이라는 얘기다. 괴물은 이를 통해 나 또한 여러 관계와 놓인 상황에 따라 누군가에게 괴물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회가 쉽게 내뱉는 보편성이라는 이름의 전형적인 시각이…
성소수자 보도, 어떻게 할 것인가
미디어 재현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점차로 저널리즘의 중요한 규준이 되어가면서, 서구 언론사와 관련 공적 기관들은 성소수자, 장애인, 선주민 등의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별도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고 있다. 호주의 경우 호주언론평의회(Australian Press Council)가 2019년 성소수자를 위한 보도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바 있고 영국의 언론인노동조합(National Union of Journalists)에서도 2021년 NUJ guidelines on LGBT+ reporting을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가이드라인은 성
포털 뉴스와 기술 규제
만약 사회적으로 중요성을 가지는 시스템이 문제가 있다면, 정부와 규제 기관의 주목을 받게 된다. 과거에도 인터넷에는 혐오표현이 있었으나, 이러한 주장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당시 기술은 규모가 작은 산업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후 기술 기업이 모든 사람을 연결하며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이후 기술은 규제 대상 산업이 되었다. 하지만 기술 기업을 어떻게 규제할지 문제란 단순하지 않다. 예를 들면, 자동차 기업에게 차를 더 안전하게 만들라고 할 수 있지만, 모든 사고를 없애라고 할 수는 없다. 배기가스 배출 기준을…
'갔다올게'라는 흔한 말
별은 알고 있다(권오연 감독)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공동체 상영회를 준비하고 있다. 이 다큐는 10.29이태원참사시민대책회의가 만든 영화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영화 제작진과 유족들은 전국을 돌며 상영회에 참석하고 있다. 청주에서는 오송참사시민대책위가 19일에 공동체 상영회를 열었다. 나는 오송대책위 소속으로 관객과의 대화 사회를 맡아 미리 영화를 보고 함께 나눌 이야기를 정리했다. 여러 행사를 진행해왔지만 이번에는 참 쉽지 않다.2022년 10월29일, 서울 이태원 한복판에서 159명이 세상을 떠났다. 가까운 사람에게…
언제까지 받아쓸 것인가?
2014년 4월16일,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언론은 서서히 침몰하는 대형 여객선을 지켜보면서도 해경이 불러주는 구조상황만 받아썼다. 국가는 전국에 있는 해난구조전문가를 모두 진도 앞바다에 투입하여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더 구조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듯했다. 최소한 언론에 보도된 해경 발표는 그랬다. 그러나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8시간 동안 대통령은 TV화면에서 사라졌다. 대통령의 사라진 8시간을 감추기 위해 청와대는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언론은 충실히 받아 썼다. 정부가 국민을 기만하는 동안, 언
다시 생각하는 '언론의 품격'과 사적 영역 보도
연말이다. 지난 한 해 동안, 언론윤리 차원에서 참으로 많은 논란이 벌어졌다. 특히 최근에는 배우 이선균씨의 육성 보도나 남현희씨나 황의조 선수 사건 등 선정적 보도가 쏟아졌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언론의 품격이라는 것이 떠올랐다.언론과 품격이라는 말이 연결될 수 있을지 의아한 이도 있을 것 같다. 딱 10년 전에 한국 언론의 품격이라는 책을 쓸 때도 그랬다. 운 좋게 훌륭한 분들 틈에 끼어서 언론법제 부분을 쓸 기회가 있었는데, 제목을 놓고 같은 논란이 있었다. 책을 기획한 관훈클럽 집행부는 없는 품격이라도 만들어가야 한다는 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