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 언론의 편집장'은 안종필 기자(1937~1980)에 대한 기록이다. 안종필은 1975년 3월 동아일보에서 쫓겨난 후 동아투위 2대 위원장을 맡아 권력의 폭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1970년대 후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다. 신문과 방송이 일체 보도하지 않은 민주화운동과 인권 관련 사건 등을 <동아투위소식지>에 실었다가 구속됐고, 투옥 중 얻은 병마로 1980년 타계했다. 안종필의 이야기를 매주 2회 연재한다. [편집자 주]
부산일보 기자 시절, 안종필은 평생의 반려자인 이광자를 만난다. 이광자는 1941년생으로 안종필보다 네 살 어렸다. 대구에 살다가 고등학교 때 부산으로 이사 온 이광자는 1963년 숙명여대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대병원 약제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몸매로 부산대병원에서 내로라하는 미인이었다. 뒷날 안종필이 가족들에게 “야! 이광자 봐라. 각선미 끝내준다”고 자랑했을 정도였다. 그런 이광자를 소개한 건 안종필 둘째 동생 안광숙이었다. 두 사람은 부산여고 동창이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겨울 어느 날, 이광자는 안광숙을 만났다. 풋풋한 여고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를 떨었다. 그런 와중에 안광숙이 넌지시 말했다.
“광자야, 너 요즘 사귀는 사람 있어?”
“얘는 무슨…”
“그럼 우리 큰 오빠 한번 안 만나볼래?”
“종필이 오빠?”
“응, 부산일보에 다니고 있어.”
“기자가 됐구나….”
친구 오빠로만 알고 있던 안종필이었다. 안종필을 좋아하는 여고 동창이 있다고 들었지만, 이광자의 눈에 안종필은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안광숙을 통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군에 갔다는 얘기를 들은 정도였다. 안광숙이 오빠가 시험을 준비하는 데 약대 전공 서적이 필요하다 해서 책을 빌려줬고, 그 책을 돌려받으며 만난 기억이 떠올랐다.
첫 만남은 부산 토성동 한 다방이었다. 안종필은 주로 듣는 편이었지만 이야기가 통했다. 만날수록 안종필은 괜찮은 남자였다.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면서 만났던 오빠들과 달랐다. 과묵하고 이지적인 데다 기자라서 그런지 예리한 안목에 시대를 앞서가는 분위기를 풍기는 멋진 남자였다. 안종필은 스물일곱 살, 이광자는 스물세 살이었다.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안종필이 조선일보로 이직하면서 애틋하게 피어올랐다. 안종필은 1965년 4월 조선일보 편집기자로 스카우트됐다. 당시 조선일보는 지면 쇄신을 위해 편집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편집기자 출신인 37세의 김경환을 편집국장에 임명했다. 김경환은 몸이나 마음이 단단하고 굵다 하여 ‘고딕체 신문인’으로 불렸다. 뉴스의 핵심을 잘 뽑아내 독자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데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출근 시간은 정확해도 퇴근 시간은 없는 국장으로도 유명했다.
“편집이 바뀌면 신문의 얼굴이 바뀐다”는 것이 1964년 11월 조선일보 대표이사로 취임한 방우영의 지론이었다. 방우영은 최고의 편집자를 데려오라며 김경환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김경환은 1965년 수습기자 공채를 세 차례 실시해 30여명을 뽑고, 각 신문사에서 젊고 유능한 편집기자들을 대거 데려왔다. 이 무렵, 안종필이 조선일보에 입사한 것이다. 조선일보 편집부에는 4·19 관련 지면으로 주목을 받아 1960년 6월 조선일보로 스카우트된 부산일보 편집기자 출신 조병철도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3년 만에 상경한 안종필은 낯선 환경에 적응할 여력도 없이 조병철을 비롯해 윤임술, 이우세, 조영서, 최병렬, 이상우, 권도홍 등 뛰어난 편집자들 밑에서 배웠다. 집에 돌아가 잠자리에 누우면 천장을 배경으로 레이아웃을 할 정도였다. 1965년 5월 신아일보가 창간되고 9월엔 삼성그룹의 이병철을 사장으로 하는 중앙일보가 창간되면서 신문전쟁은 더 치열해졌다. 그 틈바구니에서 3년차 기자 안종필은 편집기자 능력을 담금질했다.
안종필은 이광자를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전화를 매일 걸어도 남는 진한 아쉬움을 가끔의 만남으로 달래야 했다. 당시 서울에서 부산을 가려면 가장 빠른 속도 열차인 무궁화호를 타도 6시간40분이 걸렸다. 서울과 부산의 중간인 대구와 대전 등에서 만나며 장거리 연애를 시작했다. 한 달에 한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그럴수록 사랑의 감정은 더 애틋해졌다.
자연스레 결혼 얘기가 오갔다. 하지만 이광자의 집에선 약대를 나온 딸이 의사와 결혼하길 원했다. 신문기자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다. 이광자의 양친은 6남매 중 맏이자 외딸이 기자한테 시집가겠다고 하자 야단도 치고 달래기도 하며 마음을 돌리려 했다. 어머니는 팔 남매에 대종가의 맏며느리로 들어가면 시집살이 고생이 말이 아닐 거라며 극구 반대했다. 시집살이 하나도 안 하고 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설득해도 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게 네 맘대로 되냐며 한 달간 드러누웠다. 이광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랑에 빠진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다고 했던가. 두 사람은 1965년 11월16일 부산 광복동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광자가 다니던 부민교회 김주오 목사가 주례를 섰다.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안종필 부부는 부산 보수동 집에서 하룻밤 묵고 서울로 올라왔다. 살림집은 서대문구 아현동에 있었다. 대청마루가 본채와 통하는 ‘ㄷ’자 형태의 낡은 한옥이었다. 별 하나를 단 장군인 집주인은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별채를 내주며 잘 대해줬다.
이 무렵 안종필은 조선일보 편집기자로 바쁘게 지냈다. 편집기자들은 야근이 잦은 편인데도 늦더라도 저녁은 꼭 집에 와서 먹었다. 집에서 혼자 지내는 새댁 이광자를 배려해서다. 신혼 살림은 궁핍하지도 넉넉하지도 않았다. 신혼의 단꿈에 빠질 시기였다. 1966년 목련이 필 무렵 안종필은 이광자의 임신을 확인했다. 이광자는 그해 10월 부산 남산 한 병원에서 아이를 낳았다. 두 사람을 반반씩 닮은 남자아이였다. 아들 이름을 ‘안민영’이라고 지었다.
안종필은 아들을 낳고 한 달이 지났을 무렵, 동아일보로 옮겼다. 1966년 11월쯤이다. 동아일보는 당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권위지였다. 그때 대학가에서는 3대 고시로 공직은 고등고시, 금융은 한국은행, 언론은 동아일보라고 이야기했다. 그해 40만5000부이던 발행부수는 1967년 한국 신문 사상 처음으로 50만부를 돌파하는 등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영향력과 사원 대우에서 다른 신문을 압도하는 동아일보에서 일하기를 기자들은 원했다. 안종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시기 안종필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유력신문 동아일보에서 일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 조선일보사 『조선일보 100년사(中)』,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