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의견청취’란 명분을 내세워 KBS,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등과의 간담회 추진을 강행하면서 비판과 반발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인수위가 직접 언론사를 불러들이는 건 법적 근거도 없거니와 군사독재 이후론 전례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80년 신군부 이후 처음…“언론 길들이기” 비판
전국언론노조 MBC본부는 25일 ‘국보위 망령의 부활인가? MBC 손보기의 시작인가?’란 제목의 성명을 내고 “그 어떤 정권 인수위에서도 전례가 없는 방문진 소환이다. 공영방송 MBC를 철저하게 파괴하려 했던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조차 이렇게 대놓고 방문진을 소환하지는 않았다”고 성토했다.
전례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뒤 임시 행정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고 국보위와 보안사를 통해 언론 사주들을 불러 간담회를 열었다. 이후 언론 통폐합 정책 등의 뼈대가 만들어졌다. 이번 인수위의 KBS, 방문진 소환을 놓고 ‘방송장악’ ‘언론 길들이기’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엔 이런 배경도 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은 24일 성명을 내고 “인수위는 공영방송을 권력의 힘으로 길들이기 내지 정치권 줄세우기를 위해 기선 제압용으로 이런 발상을 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라며 “과거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방송장악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도·편성 사항은 제외? 과연?
언론 탄압 논란이 일자 인수위는 애초 업무보고 형식으로 진행하려던 것을 ‘간담회’라며 말을 바꿨다가, 다시 ‘미디어·IT 업계 릴레이 간담회’ 형식으로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머니투데이 보도에 따르면 인수위 과학기술교육분과는 방송·통신·언론 등 유관기관·단체 및 현업단체 등과 릴레이 간담회를 추진하겠다며 “국정과제 선정에 앞서 관련 업계 의견을 청취하려는 취지”라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KBS, 방문진을 대상으로 한 간담회도 릴레이 간담회 일환으로 진행되며, 보도·편성 관련 사항은 원천적으로 제외한다”고 밝혔다고, 머니투데이는 전했다.
그러나 단순히 ‘의견청취’ 목적이라는 설명을 그대로 믿기는 힘들어 보인다. 과학기술교육분과 간사인 박성중 국민의힘은 국회 과방위원으로 활동하며 KBS와 MBC를 편향방송이라고 몰아붙이고 KBS, MBC 사장의 사퇴 등을 주장한 인물이다. 게다가 국민의힘은 대선 직후 토론회를 열어 “공영방송이 특정 캠프의 스피커 역할을 해왔다”고 주장하며 공영방송 개혁을 예고한 바 있다. 대주주인 방문진을 대리로 불러 “MBC의 군기를 잡겠다”는 사전경고로 해석되는 이유다.
수신료와 세금 받으니까? 그럼 EBS와 연합뉴스는?
또한, 신용현 인수위 대변인은 지난 24일 브리핑에서 “방송콘텐츠나 방송 내용에 대해 간섭하면 안 되지만 KBS와 MBC의 운영 상태, 경영 상태에 대해선 국민 세금이 들어가고 (KBS가) 수신료를 받고 있기 때문에 형식을 어떻게 하든지 상황을 파악하는 게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의견청취라고는 하나 공영방송사인 KBS와 MBC의 경영 실태를 파악하겠다는 것이다. MBC 한 관계자는 “경영과 보도, 방송 내용이 분리가 되겠나”라며 “형식적으로 숙원 사업을 듣고 공정성 확보 방안을 고민해 달라는 식으로 보도에 대해 협박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부른다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 행위”라고 덧붙였다.
국민 세금이 들어가므로 실태 파악이 필요하다는 말에도 어폐가 있다. 방문진이나 MBC는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지 않는다. 방문진 재원인 방송문화진흥자금은 MBC의 출연금 등으로 조성되며, MBC가 국민 세금으로 지원받는 것은 없다. KBS가 받는 수신료가 준조세 성격이라고 한다면 역시 수신료를 받는 EBS는 간담회 대상에서 왜 빠져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정부로부터 매년 약 300억원의 재정보조를 받는 연합뉴스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KBS와 EBS는 공사(公社)이긴 하나 공공기관운영법의 공공기관 지정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다. 언론의 특수성을 고려해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을 제한하기 위해서다. 대신 국민이 납부하는 수신료를 받기 때문에 대의기관인 국회의 국정감사 등을 받는다. 수신료 결정 역시 국회가 승인하며, 정부(방송통신위원회)는 원칙상 관여할 수 없다.
법적 근거 없지만 거부 어려워…구체적 일정·내용도 ‘미정’
이처럼 법적 근거도 없는 인수위의 소환 요청이지만 KBS나 방문진 등이 이를 거부하긴 어렵다. KBS 한 관계자는 “인수위에서 릴레이 간담회 형태로 여기저기 다 하는 모양이어서 안 가겠다고 하기가 애매한 상황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방문진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나 인수위원장과의 면담이 아닌 해당 분과와의 간담회인 만큼 KBS 사장, 방문진 이사장 같은 기관장이 참석하지 않고 실무 책임자 정도가 참석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간담회 일정 등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다. 25일 오후 2시 현재까지도 KBS와 방문진 어느 쪽도 구체적인 일정이나 내용, 형식 등에 대해 전달받은 것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