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씨가 23일 광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사과를 끝내 하지 않고 사망했다. 전두환은 쿠데타, 군사반란 범죄의 수괴로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한 중죄인이다. 그는 내란 과정에서 언론인 불법해직, 언론사 통폐합이라는 범죄를 저질러 헌정 사상 최악의 언론탄압을 자행했던 정치군인으로 대법원의 판결을 받았다.
그는 그동안 광주항쟁의 진상을 왜곡하거나 허위사실로 폄훼하는 작태를 벌였고 결국 자신의 범죄 사실에 대해 사과나 용서를 빌지 않은 채 세상을 등졌다. 그는 이 사회에서 광주 민중항쟁의 진실에 대해 여전히 악의적으로 부인하면서 가짜뉴스를 퍼뜨리던 세력의 핵심 추동력 역할을 했었다. 그러다가 진실이 무엇인지에 승복하지 않아 이 사회의 정의 수립에 역행하는 짓을 저지르고 세상을 등졌다. 그 결과 계엄군이 누구의 명령에 따라 발포하고 시민군을 향해 헬기 사격을 가했는지 등 5·18광주민주화운동의 핵심적 진상 일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두환, 박정희 사살 후 정권 찬탈 야욕 드러나
전두환은 박정희가 1979년 18년간의 장기집권 끝에 당시 권력 2인자 격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된 10·26 이후 자신이 유신 적자라고 내세우면서 권력을 넘보는 마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는 12·12 쿠데타를 통해 군부를 장악한 뒤 계엄사의 검열단을 통한 보도지침을 통해 시민사회의 민주화 요구를 왜곡, 축소하거나 자신을 미화하는 기사 보도를 강행하면서 정권찬탈의 야욕을 드러냈다.
언론계는 전두환을 우두머리로 한 계엄사의 비이성적이고 부당한 언론검열이 언론기능을 마비시키고 사회 민주화를 저해하는 것이라 비판, 반발하며 유신언론 청산 등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대학가와 시민사회단체 등의 정치 민주화 주장 및 운동과 언론자유 억압에 대한 비판도 언론을 크게 자극했다.
1980년 3월 김태홍 합동통신 기자가 한국기자협회장으로 당선된 뒤 그 집행부가 언론자유 운동의 선봉에 서면서, 중앙 및 지방의 많은 언론사들은 비상계엄령 해제, 검열철폐, 사실보도 구현 등을 주장했다.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민주화에 역행하는 비정상적인 정치적 상황 개선, 언론의 자성과 본연의 사회적 기능 회복을 주장한 것이다. 언론 운동이 활발했던 중앙 언론사는 동아일보, 중앙일보, TBC, 합동통신, 기독교 방송, 경향신문, 동아방송, 한국일보, MBC 등이었다.
지방언론사들도 자유언론운동에 합류했다. 부산과 광주, 대구 언론사 등에서 검열철폐와 제작거부 운동이 벌어졌다. 부산진 경찰서 출입기자들이 5월2일 자유언론 확보 선언을 한 데 이어 국제신문 기자들은 6일부터 9일까지 검열철폐, 편집권 독립, 노조결성 보장 등을 요구하고 신문제작을 지연시키며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전남매일 신문이 13일, 대구 MBC와 매일신문이 15일, 전남일보가 각각 검열거부를 천명했다.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과 보도금지
기자협회는 전국 언론사 기자협회 분회 주도로 언론자유실천운동과 검열거부 결의 등이 고조되자 5월16일 검열거부 실천운동을 강행하기로 결의했다. 신군부는 기자협회의 검열거부 선언 다음날인 5월17일을 기해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탄압책을 발동했다. 이는 결국 광주항쟁을 유발했고 민간인 대량 살상으로 이어지면서 기자협회 간부 등이 포함된 언론인들과 정치인 등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불었다. 기자협회는 군홧발에 유린되었지만 기협 결의사항은 전국 기자들에게 전달되었고 광주에서는 계엄군 만행이 자행되는 야만적 참극이 진행되고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계엄군이 광주시민을 무차별 살상하는 참극을 벌이면서 계엄당국을 통해 광주 참상에 대한 보도금지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외신은 광주학살을 시시각각 보도하고 있어서 국내 언론인들은 전 세계가 알고 있는 참극을 국내에서 보도하지 못한다는 좌절감과 분노에 휩싸였고 이는 신군부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졌다.
전국 각지의 언론사별로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기자 총회 등이 열려 기자협회가 결정했던 검열 및 제작거부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국 언론사의 편집국, 보도국 등에서 기자 총회가 열리는 동안 보안사, 경찰의 감시와 언론사 동태 파악이 이뤄지고 있었다. 언론사 내에 동료를 신군부 쪽에 밀고하는 동조세력도 있었다. 보안사와 문화공보부 쪽은 각 언론사의 검열 및 제작거부 주동 기자를 정탐해 신군부에게 보고했다. 신군부에 맞선 기자들은 언론사 안팎의 적들과도 싸워야 하는 샌드위치 투쟁을 벌여야 했다.
서울지역 언론사들을 중심으로 5월20일 검열 및 제작거부 투쟁이 강행되어 서울시청에 나가 있던 검열담당 기자들이 철수했다. 부산 등지의 언론사들도 동조했다. 동시에 취재와 신문, 방송의 제작 업무를 거부하는 제작거부가 실천되었다. 전국 기자들은 언론사 별로 치열한 내부 토론 등을 거치고 다른 언론사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면서 5월27일까지 검열거부, 제작거부를 감행했다.
광주에서 엄청난 유혈 참극과 저항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맨손으로 신군부에게 저항하는 동안 언론사에 대한 협박 공갈도 대단했다. 전두환은 서울 주요 언론사 사장들을 불러 모아 기자들의 검열 및 제작거부가 중단되지 않으면 책임을 묻겠다는 식으로 협박했다. 신군부는 전국 주요언론사 앞에 장갑차와 무장군인이 진주시키는 등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기자들은 대부분 편집국이나 보도국에서 철야하며 투쟁했다.
그러나 언론인들의 신군부에 대한 투쟁 기간 신문·방송·통신의 제작은 중단되지 않아 국민들에게 언론의 군부에 대한 항거가 외부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광주항쟁 기간 광주 일원을 제외하고 신군부에 저항한 세력은 언론계가 유일했다. 광주시민이 온몸으로 신군부의 폭거에 맞설 때 기자들은 펜을 놓고 광주시민과 뜻을 같이했다. 언론인들은 광주가 신군부의 군홧발에 함락된 5월27일 피눈물을 흘리며 투쟁을 접어야 했다. 그 후 수많은 언론인이 불법적으로 해직되어 거리로 내쫓겼고, 언론사 강제 통폐합이 이뤄지는 등 신군부의 ‘언론학살’이 자행되었다.
언론인 1000여명 강제해직과 언론사 강제통폐합
신군부는 1980년 7월 말 각 언론단체에 자체적인 정화결의를 하도록 강제했다. 그에 따라 신문협회·방송협회 등이 7월29일, 31일에 걸쳐 ‘언론자율정화 및 언론인 자질향상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하는 꼭두각시놀음을 벌였다. 언론단체들의 자율결의가 발표되면서 100여 종의 정기간행물에 대한 폐간조치가 내려졌다. 신군부는 7월31일 ‘사회불안 조성’, ‘계급의식 조장’, ‘ 음란 저속’ 등의 이유를 내세워 주간 15종, 월간 104종, 격월간 13종, 계간 16종, 연간 24종 등 172종의 정기간행물을 폐간토록 강제했다. 폐간된 매체는 ‘뿌리 깊은 나무’, ‘창작과 비평’, ‘기자협회보’ 등 비판적인 논조로 지식인들의 사랑을 받던 매체들이 포함되었다.
정기간행물 폐간 조치에 이어 검열 및 제작거부에 앞장선 언론인 등에 대한 칼질이 시작됐다. 해직절차는 전국 언론사에서 연출된 ‘일괄 사직서 제출’로 그 막을 열었다. 언론인 모두에게 불법적으로 의원사직서를 내게 해서 선별수리 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오늘날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권력의 폭거였다. 일부 기자들이 사표 강요는 불법이라면서 반발했으나 결국 1000여명에 가까운 언론인이 직장에서 쫓겨났다. 신군부에게 저항한 기자들은 각 언론사 담당 부장, 차장들이 체크해 보안사 등에 ‘밀고’했지만 이에 대한 진상규명은 오늘날까지 시도조차 되지 않았다.
강제해직된 언론인에 대한 숫자는 당시 보안사, 문공부 등에서 만든 자료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내란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강행된 해직 자체가 불법적 행위였고 해직기자들을 선정하는 과정이 음모적으로 행해진 결과였다. 언론인의 불법적인 강제 축출이 사법적 판단과 같은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신군부 하수인들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이뤄진 것이 해 언론인 숫자 등이 혼란스러운 이유의 하나가 되고 있다.
80년 8월16일 당시 문공부 공보국장이었던 이수정이 작성한 공식문건인 ‘언론정화 결과’에 따르면 희생된 언론인이 모두 933명이다. 그 가운데 298명은 신군부가 직접 정화대상자로 선정했고, 나머지 635명은 언론사 경영진이 자체적으로 끼워 넣은 것으로 되어 있다. 신군부가 언론인 불법해직 작업에 언론사 경영진을 연루시킨 것은 신군부의 범죄행각을 물타기 하면서 언론 내부의 분열과 갈등을 유발하려는 공작정치의 일환이기도 했다.
당시 언론계의 해직자 분포 상황을 보면, 중앙일간지 265명, 서울지역 방송사 219명, 통신 2개사 22명, 경제지 4개사 34명, 특수통신 4개사 34명, 지방지 14개사 235명, MBC 지방사 99명 등이었다. 이상과 같은 언론인 학살은 세계 언론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폭거였다.
신군부는 검열거부 등에서 나타난 언론이 지닌 잠재적 폭발력을 원천적으로 잠재우기 위해 언론사 통폐합을 강행했다. 신군부는 언론인 강제 불법해직 작업이 끝난 뒤 3개월여 만에 신문협회와 방송협회를 앞세워 신문·방송·통신 등의 언론산업 전체의 대대적인 구조 변경을 강요하는 범죄행각을 자행했다. 두 협회는 11월14일 임시총회를 열고 언론사 통폐합을 주 내용으로 하는 ‘건전언론육성과 창달에 관한 결의문’을 채택한다.
이 결의에 따라 전국 64개 언론사(신문 28개사, 방송 29개사, 통신 7개사) 가운데 신문 14개사(중앙지 1개사, 지방지 11개사, 경제지 2개사)와 방송 27개사(중앙과 지방 각 3개사, MBC계열사 21개사), 통신 7개사가 통폐합된다. 이 과정에서 언론인 300여명이 해직됐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언론사가 통폐합되는 과정에 피해를 당했지만 지금까지 구제받지 못하고 있다.
신군부는 언론사 통폐합이 진행되던 1980년 11월 언론을 완벽하게 권력의 손아귀에 집어넣을 제도적 장치인 언론기본법을 만들었다. 문공부 장관이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 또는 정지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많은 독소조항을 담고 있는 이 법이 12월31일 공포와 함께 시행됨으로써 언론은 권력의 하부 기구로 편입되었다.
신군부가 언론계 전체에 대해 인적, 구조적으로 폭력을 자행한 것은 내란의 범죄행위였고 이에 덧붙여 여론조작을 일상화하는 작업으로 매일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보내서 보도 불가나 기사 크기 내용을 조작토록 강요했다.
해직언론인 블랙리스트와 5·18 진상 왜곡 책동
신군부는 80년 언론학살 당시 신군부에 저항한 언론인과 함께 일부 언론인들을 ‘국시부정’, ‘반정부’라는 극단적인 혐의로 기재하거나 일부는 부조리라는 해괴한 구실을 해직 사유로 블랙리스트에 적어 넣었다. 신군부가 정당한 재판 등의 법적 절차 없이 자의적으로 해직언론인들의 성향을 여러 가지로 분류해 만든 블랙리스트를 전국 각급 공공기관, 대기업, 언론사 등에 배포한 것도 공작정치의 결과였다. 즉 80년 해직언론인의 구심점을 파괴하려는 노림수였다.
신군부는 동아·조선투위가 동일한 사유로 해직되자 단일 대오를 형성해 민주화 투쟁을 벌인 것을 보고 80년 해직언론인들을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해직언론인들이 일체감을 갖는 것을 저해하기 위해 새로 고안한 악랄한 수법의 만행을 자행한 것이다. 80년 해직언론인 가운데 근거 없이, 법적 절차 등을 전혀 거치지 않은 채 불명예스러운 명목으로 신군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들의 심적 고통이 엄청나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배상 등의 조치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신군부는 1988년을 전후해 일부 80년 해직언론인을 복직이라는 허울을 씌워 신규 취업시키기도 했는데 이는 80년 언론투쟁의 의미를 무력화시키는 것과 함께 80년 전체 해직언론인의 투쟁력을 약화하려는 공작정치의 일환이기도 했다. 신군부는 언론사 통폐합도 법률적으로 문제 삼을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법적 제소 등에 대비했다. 정치군인들이 법 위에서 폭거를 자행한 행위는 80년 언론학살 대상 모두에게 적용되었다.
80년 언론인 투쟁은 광주항쟁의 일부임에도 광주항쟁을 지역적인 문제로 국한하려는 신군부와 그에 동조적인 정치권이나 공범 역할을 했던 일부 언론사에 의해 40년 동안 광주항쟁과 분리된 개념으로 왜곡돼왔다. 전두환은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기 위해 정부가 1985년 비밀리에 조직한 ‘80위원회’에 직접 관여했고 80위원회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와 보안사 등이 참여해 5·18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왜곡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문화공보부(문공부) 해외공보관실은 ‘광주사태 진상 해외홍보책자 발간계획 보고’라는 제목의 문건을 통해 국방장관이 같은 해 6월 초 국회 국방위원회에 보고한 “5·18 직전 북한군이 남침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정치세력의 배후 조종을 받았다. 시민들이 계엄군에게 기관총 등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하고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 계획은 전두환에게 보고되었다<경향신문 2020년 4월23일>.
80년 언론인 불법해직 진상 규명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사건이 신군부의 불법행위라는 것은 1988년 국회 청문회 및 1997년 전두환, 노태우 등의 내란음모 사건 조사과정에서 그 사실관계가 일부분 밝혀졌고, 대법원이 이를 내란죄의 일부로 판결한 바 있다. 또한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 10월, 국가공식기구인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10년 1월 각각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 결과를 발표해 그 전모가 밝혀졌다.
국회에서 1980년 언론인 투쟁에 대한 특별법이 2010년, 2015년 각각 제출되었지만 성사되지 못했고 민병두 의원은 등 더불어민주당 의원 17명이 2016년 2월 80년 해직언론인을 5·18민주화운동 관련자의 범위에 포함하는 내용의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회기가 만료되면서 폐기됐다.
80년 언론인 투쟁은 광주항쟁의 일부임에도 광주항쟁에 포함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빗나간 것은, 광주항쟁을 지역적인 문제로 국한하려는 신군부에 동조적인 정치권이나 공범 역할을 했던 일부 언론사 고위층 등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전두환 등에 대한 1·2심 공소장과 판결문 내용
1980년 언론인 불법해직은 법적 심판을 받았는데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의 내란 범죄에 대한 ‘5·17, 5·18 관련사건 공소장’에 포함된 언론학살 관련 공소장과 판결문에 포함됐다.
80년 언론인 학살의 진상은 문민정부 들어 전두환, 노태우의 내란죄 수사를 담당한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가 1996년 1월24일 전두환, 정호용 등 11명의 내란수괴에 대한 혐의사실을 발표하면서 드러났다. ‘5·17, 5·18 관련 사건 공소장’에서 80년 언론인 대량 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집권계획 일환으로 자행된 내란의 주요 과정이었다는 사실이 공표되었다. 검찰이 언론학살을 자행한 범죄인으로 지목한 사람은 전두환, 노태우, 허삼수, 허화평 등 4명이었다.
전두환·노태우 등의 내란죄에 대한 1996년 8월26일 1심, 그해 12월17일 2심 판결문에서 80년 언론학살은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내란 과정에서 이뤄진 불법 행위라는 것이 밝혀졌다. 검찰의 언론학살 수사결과는 1·2심 재판을 통해 대부분 사실로 인정되었고, 전두환·노태우가 상고를 포기함에 따라 항소심 판결문에 적시된 범죄 사실은 최종적인 사법적 판단이 되었다. 공소장과 판결문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80년 언론인 해직은 신군부가 저지른 범죄라는 사실이 전두환 수괴 등에 대한 대법원 판결에서 확정된 뒤 80년 해직언론인들에 대한 배상과 명예회복 등의 조치가 급물살을 타는 듯 했다. 즉 김대중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 시절인 1997년 대선 공약으로 80년 해직언론인의 원상회복을 약속했고, 집권당이 된 국민회의가 특별법으로 그 해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또한 IMF 재정난 등을 이유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80년 언론인 투쟁은 민주화보상심의위원회를 통해 200여 명이 민주화 관련자로 인정받아 그 역사적 의미가 공식 확인되기도 했다.
80년 언론투쟁, 광주항쟁과 하나가 되다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 지난 5월2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1996년 5·18 특별법 제정 당시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던 해직자를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범위에 포함한 것이다.
1980년 한국기자협회와 전국 언론사 기협 분회 소속 언론인들이 전두환 신군부의 광주학살 만행에 항거해 검역, 제작거부를 한 뒤 41년 만에 1980년 광주항쟁과 언론투쟁이 하나가 되었다. 이로써 광주항쟁이 전국 규모에서 벌어진 진실이 만천하에 확인되고 광주항쟁과 언론투쟁에 대한 역사 바로잡기가 완성의 단계에 다가간 것이다.
한국기자협회와 5·18기념재단은 6월24일 1980년 5월 신군부에 항거 후 불법 해직된 언론인들이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됨에 따라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과 가치 계승을 위한 상호 협력·공동사업을 펼치기로 합의했다. 5·18 왜곡과 폄훼 공동 대응, 악의적인 가짜뉴스 배격 방안 논의 등이 대표적이다.
한국기자협회는 지난 2006년, 5월 항쟁 기간 언론인들의 신군부에 대한 투쟁을 기리기 위해 5월20일을 ‘기자의 날’로 제정하여 5·18기념재단과 토론회 등 공동행사를 진행하면서 5·18언론상을 후원하고 있다. 기자협회가 80년 언론인 투쟁을 기자의 날로 기리려 한 것은 80년 언론인 투쟁이 한국 언론 정사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은 정부 수립 이후 군사정권이 종식될 때까지 정치권력 폭력적인 통제의 대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언론인 불법해직이 수시로 자행되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동아·조선 언론인 불법해직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가 언론인 불법해직에다 언론사 통폐합까지 자행하면서 그 폐해와 후유증은 오늘날까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언론인 불법해직은 정치권력이 언론계 전체를 겁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도 반복되었다.
오늘날 사회가 급변하고 있지만 언론의 역할에 그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원인은 다각도로 규명되어야 하겠지만 박정희, 전두환이 자행한 언론탄압에 대한 청산과 원상회복 노력이 미흡한 것도 주요인의 하나였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80년 언론인 투쟁이 광주항쟁의 일부로 법에 의해 공인되는 작업이 41년이나 걸린 것은 전두환 등이 자행한 정치공작의 독기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입증한 사례의 하나다. 정치군인들이 내란 과정에서 자의적으로 만들어놓은 일부 해직언론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해직 사유가 민주화 운동 인정이나 국회 입법 과정 등에서 활용된 것에 대해 문제 제기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는 정치군인들이 만들어놓은 프레임에 갇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역사적 범죄에 대해 풀어야 과제가 여전히 산적해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또한 1980년 당시 전두환의 내란 과정에서 자행된 언론사 통폐합과 그 과정에서 직장을 잃은 언론인에 대한 언론계 또는 정치사회적 관심은 찾아보기 힘들고 75년 동아·조선투위 문제 또한 마찬가지다. 전두환이 범죄 사실에 대해 반성, 사과조차 없었다는 점은 이 사회의 일각에서 암약하고 있는 반민주적 적폐세력이 여전하다는 반증의 하나다. 언론은 이런 사실을 직시하고 사회 발전의 선봉에 서기 위해 노력하면서 군부독재가 만들어놓은 뒤 방치된 언론 안팎의 적폐 청산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