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권 독립은 언론으로서 접을 수 없는 원칙"
사상 초유의 출근투쟁…이정호 부산일보 편집국장
이대호 기자 dhlee@journalist.or.kr | 입력
2012.07.18 15:5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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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일보 이정호 편집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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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일보에서 편집국과 경영진은 딴 세상에 산다. 지분 100%를 보유한 완벽한 사주인 정수장학회가 사장을 임명하지만 그 사장의 입김은 편집국 문턱을 한 치도 넘지 못한다. 편집국은 이 소유구조와 상관없이 편집국장과 기자, 그들만의 질서로 움직일 뿐이다.
이것은 강력한 편집권 독립장치가 작동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 핵심이 편집국장 추천제다. 편집국장을 노조의 추천을 거쳐 사장이 임명토록 단체협약에 명시해 기자들의 지지가 선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편집국장은 사장이나 사주가 아니라 기자들을 바라본다. 1988년 이후 벌써 20년 넘게 정착된 제도다.
싸움은 정확히 이 지점에서 일어난다. 주식을 전량 보유하고도 신문의 논조와 제작에 관여하지 못하는 사주와 경영진은 끊임없이 편집국장 추천제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이에 맞서 노조와 기자들은 더 근본적인 편집권 독립장치를 구축하기 위해 사장 임명에까지 참여하려고 한다. 그동안 부산일보에서 벌어진 신문발행 중단과 노조위원장 해고, 편집국장 직무정지 등의 사태는 본질적으로 편집권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이 싸움의 한복판에 이정호 편집국장이 있다. 지난 11일 부산지방법원의 직무정지 및 출입금지 결정이 내려진 후 이 국장은 13일부터 회사 현관문 앞에 작은 책상을 내놓고 출근투쟁을 시작했다. 1988년 편집국장 추천제 도입 후 회사와의 갈등으로 편집국장이 직무를 못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사측의 공세가 강하다는 뜻이다. 이 국장이 편집국장 초유의 출근투쟁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회사는 나를 편집국장에서 배제시키려 한다. 편집국을 장악해 자기들 마음대로 지면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부산일보가 정수장학회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편집권 독립과 정수장학회와의 관계 재정립은 언론으로서 접을 수 없는 원칙이다. 회사가 나를 물리적으로 회사 밖으로 내몰 수는 있어도 내 의지는 꺾지 못한다.”
법원이 회사 측의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것에 대해서도 이 국장은 “징계 과정의 절차 문제를 무시한 결정”이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법원은 사측의 가처분을 인용한 이유를 “징계사유나 절차의 타당성 여부를 다툴 수는 있을 것이나 그 때문에 징계처분의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구체적인 징계사유와 절차의 문제는 본안소송에서 다루는 만큼 가처분에서는 징계를 했으니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는 논리다.
이 국장은 “회사가 수십 년 동안 사용해 온 단협상의 징계규정을 무시하고 회사측 인사로만 징계위원회를 구성해 나를 배제시킨 것은 일관성의 문제, 신의의 문제를 벗어나는 행위”라며 “이런 절차상의 문제를 무시한 법원의 판단은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회사 측이 진행하고 있는 편집국장 추천제 무력화 기도에도 큰 우려를 표했다. 부산일보의 편집국장 추천제는 노조가 추천대회를 통해 상위 득표자 3명을 추천하면 사장이 최다득표자를 임명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사측은 이런 관행을 지킬 의무가 없다며 2위와 3위라도 임명하겠다는 입장을 노조에 밝혔다. 이럴 경우 편집국장 직선제와 다름없는 추천제의 의미가 흔들리게 되고, 편집국은 내부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정수장학회는 편집국장 추천제 때문에 신문사가 망한다고 말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력화 기도를 해왔다. 그러나 재단이 말 잘 듣는 편집국장을 임명하는 순간 부산일보는 위태로워진다. 편집권 독립이 지켜지지 않으면 더 이상 언론이라고 볼 수 없는 것 아니냐.”
이 국장은 편집국에 없지만 부산일보 편집국은 여전히 단단한 방어막을 치고 있다. 이 국장이 계획했던 한홍구 교수의 ‘정수장학회를 말한다’는 기고가 16일부터 연재됐다. 이 국장은 “편집권에 대한 기자들의 열기가 어느 때보다 강하기 때문에 내가 건물 밖에 있다고 해서 회사 측의 시도가 호락호락 통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부산일보의 상징과도 같은 편집권 독립장치를 기자들이 잘 지켜낼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이 국장은 1988년 부산일보에 입사해 2010년 12월 20일부터 편집국장을 맡아왔다. 다음달 24일 본안소송인 징계무효소송 1심 선고를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