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진보신문이 보수신문 사들인 이유

[글로벌 리포트 | 영국]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김지현 골드스미스 런던대 문화연구 박사과정

 영국에서 정치적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오며 힘을 겨뤄온 신문사 두 곳이 합병을 선언했다. 노동당 대변지로 유명한 ‘데일리 미러’(Daily Mirror)를 비롯해 지역지 100여개를 소유한 트리니티 미러(Trinity Mirror)가 영국의 신문재벌인 리처드 데스먼드가 소유한 신문사들 전부를 1억2600만 파운드에 달하는 거금을 주고 사들였다. 브렉시트 지지론을 펼쳐 극우 성향을 증명한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와 가십성 기사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OK’, ‘스타’(Star) 등의 타블로이드지들이 포함돼 있다.

 

 그야말로 좌우통합이 이뤄진 셈이라 업계 너머로도 그 배경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하지만 내부사정을 잘 아는 현지 언론은 이번 합병은 두 기업의 정치적 견해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오로지 경제적 실익을 택한 결정이라고 말한다.

 

 지난해 6월 브렉시트 투표 결과가 공개된 후 영국 파운드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종이신문 발행 비용이 상승하자 주류 신문사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온라인 플랫폼과 소셜 미디어에서 뉴스 소비가 증가하면서 종이신문 발행을 통한 광고 판매 및 수익은 급감해 온 터, 두 신문기업이 자연스레 함께 돌파구를 찾으려 했다는 추측도 이어졌다.

 

 트리니티 미러는 이번 합병을 계기로 대규모의 구조조정을 전사적으로 시도할 계획이다. 리처드 데스먼드 개인이 100% 소유권을 보유하고 있는 노던 앤 쉘(Northern & Shell)의 신문사들은 큰 잡음 없이 트리니티 미러로 흡수될 예정이다. 이를 시작으로 모든 신문사들을 대상으로 대규모의 인력 감축 및 이동, 부서 합병이 진행되는데 현재 업계가 예상하는 인건비 감축 규모는 연평균 2000만 파운드에 달한다.
 

 이와 관련, 트리니티 미러의 사이먼 폭스(Simon Fox) 최고경영자는 이번 합병으로 "충실한 독자층을 갖고 온라인에서도 큰 존재감을 드러내며 안정적인 매출을 올려 온 노던 앤 쉘의 신문사들이 트리니티 미러와 함께 더 탁월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기대감을 표시했다. 이어 그는 “이번 결정으로 ‘미러’가 오른쪽으로 나아가거나 ‘익스프레스’가 왼쪽으로 방향을 트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이후로도 각 신문사들의 ‘편집에서의 독립성’은 보장될 것이라고 밝혔다.

 

 자신이 소유한 신문사들을 넘기는 조건으로 거액의 현금에 이어 트리니티 미러의 지분 9.4% 가량을 넘겨받기로 한 리처드 데스먼드 역시 이번 합병은 “미디어 분야의 진화와 통합을 위해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일 뿐”이라며, 어디까지나 기업 가치의 상승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가디언’을 비롯한 진보 성향의 일간지들은 이번 합병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그동안 수많은 신문사들을 사고 팔며 “가차 없이 이익을 쥐어 짜내던 신문사주”인 리처드 데스먼드일 것이라며 그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을 내비치고 있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74년에 악기 기타를 소재로 한 잡지를 발행하며 영국 출판업계에 뛰어든 리처드 데스먼드는 ‘아시안 베이브스’(Asian Babes)와 같은 소프트포르노 잡지들을 팔아 모은 돈으로 채널5와 같은 방송국까지 사들였던 영국 미디어 업계의 큰 손이다. 지난 2000년 그는 이번에 트리니티 미러에 판 ‘데일리 익스프레스’ 등을 비롯한 신문들은 1억 2500만 파운드에 사들여 18년 동안 회사 전체에 대한 독점적 소유권을 행사해왔다. 현재까지 그는 이번 인수금을 포함해 약 4억5000만 파운드에 달하는 수입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세간의 관심은 거침없는 언변으로 유명한 그가 합병 이후 트리니티 미러에서 3번째로 많은 지분을 가진 대주주가 되는 바, 혹 노동당 친화적인 신문사들에게 어떤 식으로도 영향을 행사하지는 않을지에 있다. 트리니티 미러 측은 “그는 우리를 지지하는 개인 주주로만 활동할 것”이라며 일각의 우려를 일축했다.

 

 여러 추측이 난무하는 이번 합병 건에서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트리니티 미러가 영국에서 가장 큰 신문 발행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업 발전을 위해 브렉시트 찬성론을 펼친 보수 성향의 신문까지 끌어 안은 그 결정이 영국 신문산업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기대처럼 디지털 기업들과의 광고 전쟁에서 새 돌파구를 마련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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