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 파고다

제279회 이달의 기자상 기획보도 신문 /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  
 
지난 10월3일 개천절. 편집국장이 기획취재팀을 호출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나온 팀원들은 국장을 따라 종로3가로 향했다. 파고다공원을 휘돌아 보고 낙원상가를 찍고 인사동의 한 밥집에 모여 앉았다. “얘기 거리 많지 않아?” 국장의 일성이었다.

이것이 ‘그 섬’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시작이 만만찮았다. ‘노인’,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주제를 가지고 기획을 하라니. 밑그림을 잡는데 그 진부함에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파고다공원을 찾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우리는 이곳이야말로 노인빈곤, 자식과의 단절, 고독 등 노인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이것들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사람, 장소 등 디테일에 집중하자.” 부장이 해답을 내놨다. 팀원들은 파고다공원을 샅샅이 훑고 다녔다. 자판기, 장기판, 이발소 등 어르신들이 찾고 손닿는 모든 것이 취재 대상이었다. 200원짜리 커피 자판기 앞 공간이 사랑방 역할을 하고 3500원이면 이발을 끝낼 수 있는 이곳은 흡사 20~30년전 풍광 그대로였다. 노인문제가 응축된 공간이자 공간의 시계가 과거에 머물러 있는 곳, 파고다를 섬에 빗댄 이유다.

그 섬에는 한평생 가족을 건사하느라, 밥벌이 하느라 어깨가 늘어진 노인들이 있었다. 취재 내내 ‘말해봤자 뭐해’라는 ‘자조파’ 할아버지와 ‘어이, 구구절절 이야기 해줄 것 없어’라며 인터뷰를 끊어먹는 ‘훼방파’ 할아버지 때문에 곤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개념 없이’ 질문을 해대는 기자들을 손자 손녀처럼 귀여워해 주셨다. 속이 더부룩하도록 자판기 커피를 받아 마시고 입에 단내가 나도록 사탕을 받아먹으면서 들은 어르신들의 사연에는 6·25의 포탄 소리와 산업화 시대의 땀내, 민주화 시대의 최루탄 냄새가 희미하게 묻어있었다. 과거 삶의 궤적과 지금 모습이 어떻든, 이 시간을 견뎌온 어르신들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20일간 ‘그 섬, 파고다’ 기획 시리즈에 실은 기사들은 전쟁하듯 이 시대를 살아온 노인들의 역사요, 분투기다. 그리고 삶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것들에 대한 회상이고 위로다. 취재를 마치고 섬을 빠져나왔지만 섬 안의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어르신들은 여전히 외롭고 배고프고 갈 곳이 없다. 이 점이 안타깝다.

2년차 기자가 이달의 기자상을 받다니 영광스럽다. 현장의 힘을 깨닫게 해주신 박종인 편집국장과 무사히 항해를 마치게 해준 캡틴 김동선 부장, 파고다공원에서 함께 살다시피 한 김보경, 주상돈, 백소아, 성기호 기자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아시아경제 김민영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