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4년차인 2003년 3월, 주말을 맞아 운동을 하는 도중 당시 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이라크전 취재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입사 후 첫 해외출장을 전쟁터로 가게 됐다.
당시 사진부 동기는 아프가니스탄 전을 두 번이나 취재를 다녀왔기에 전쟁 취재를 못가 본 나 역시 이라크전은 꼭 가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이라크에는 생화학 무기의 존재가 규정 사실이었기에 긴장도 많이 되었다. 동기가 아프간 전 취재 갔을 때도 없었던 방탄조끼와 생화학 무기에도 견딜 수 있는 전신복과 방독면을 서울신문사 최초로 마련했다. 생명보험도 가입하려 했으나 보험사에서 가입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혀 정말 위험한곳에 취재 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라크에 함께 가게 된 당시 국제부 김균미 차장과는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통화가 가능한 위성전화, 정전 상황에서도 전송을 하기 위한 발전기, 모래바람에 대비한 고글, 생필품 등도 장만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여 어느 정도 준비를 마쳤다.
그렇다고 전쟁취재라는 것이 원하는 데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라크전 발발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여느 언론사보다는 다소 늦게 출발을 했기에 직접 이라크로 가지는 못하고 미·영 연합군 기지 가 있는 쿠웨이트로 가게 됐다.
나름 꼼꼼하게 준비를 마치고 후세인을 취재하기 위해 이라크로 가는 날, 인천공항에서도 전쟁터 취재간다는걸 느끼기에 충분했다. 중동으로 가는 비행기가 취소돼서 갈수 없다는 것이었다. 발권하는 항공사 직원들도 그런 곳에 왜 가느냐며 웬만하면 가지 말라는 조언 아닌 조언도 들었다.
결국 쿠웨이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고 김 차장과 잠시 취재에 대한 계획을 세운 뒤 잠시 주무시는 동안 나는 취재수첩에 유서에 준하는 글을 남겼다. “오랜만에 나 자신을 돌이켜보니 나름 열심히 산 것 같다...... 암 환자들이 TV에서 암 극복기를 이야기 할 때의 모습이 이제서야 가슴으로 이해가 된다는 등......”
비행기를 환승했던 방콕역시 긴장된 분위기가 이어졌다. 승무원은 모두가 남자들이었는데 손으로 철저히 전신 검색을 했으며 가방도 모두 다 열어서 철저히 검색했다. 이라크 군인들을 보는 듯 했다.
이렇게 긴장된 분위기에 쿠웨이트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직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기에 쿠웨이트는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쿠웨이트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우리를 취재현장에 안내해줄 운전기사였다. 공교롭게도 운전기사의 이름은 우리가 취재해야할 이라크 지도자 사담 후세인과 같은 이름의 인도인 후세인이었다. 하지만 인상은 사담 후세인과 다르게 후덥지근한 아저씨의 모습이었다.
미·영 연합군이 주도하는 프레스센터에 등록을 마친 우리는 친절한 후세인의 설명을 들으며 국경지역과 유전 및 발전시설을 돌아다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고속도로를 지나가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 대규모의 미군 무기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바로 차에서 내려서 사진을 찍었고 오늘 마감할 사진은 충분하겠다는 생각으로 숙소로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쿠웨이트 경찰이었다. 설마 우리를 잡으려 왔을까 싶었는데 정말로 우리를 잡으러 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미군들의 이동경로는 알려지면 안되는 군사기밀이었기에 사진을 찍은 우리를 스파이로 오인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취재한 사진을 전송도 못할 상황이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미군의 이동모습이 담긴 메모리칩을 카메라에서 꺼내서 가방 맨 아래로 집어넣고 카메라에는 다른 칩으로 바꿔 넣었다. 하지만 운전기사 후세인은 쿠웨이트 경찰은 아주 현명해서 금방 알게 될 것이라며 메모리칩을 쿠웨이트 경찰에 가져다주라고 했다. 하지만 바꾸지 않았다. 역시나 쿠웨이트 경찰은 우리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고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스파이가 아니라 한국 기자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쿠웨이트 경찰은 한국 대사관에 연락한 뒤 우리의 신분을 보장한다는 확답을 받고나서 3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를 풀어준다고 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메모리칩은 압수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이미지도 없는, 미리 바꾸어 두었던 칩을 가리키며 모든 사진을 삭제해서 아무것도 저장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자리에서 찍어서 삭제하는 것도 시연을 했는데 무조건 칩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빈 메모리칩을 하나 빼앗기고는 경찰서를 나왔다.
물론 미군의 이동모습은 잘 마감 시켰고 당시 대한매일 1면에도 잘 게재 됐다. 그렇다고 이라크에서 한국 신문을 보고 미군들이 어디로 이동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캐내지도 않았으리라... 그때부터 후세인은 우리에게 “Korean mind!” 라는 신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취재 첫날부터 확실하게 액땜을 한 우리는 다음날부터 본격적인 취재를 시작했다. 국경지역에서 미군들의 모습, 쿠웨이트 경찰들, 미군을 환영하는 쿠웨이트인들......
어느덧 점심때가 되어서 맥도날드에 차를 세우고 운전기사 후세인에게 같이 가자고 했는데 후세인은 배가 안고프다며 우리들만 먹으라고 했다. 그날은 배가 정말로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그날만이 아니었다. 몇 일 뒤에는 김 차장께서 배가 안고프니 후세인하고 점심 먹으라고 하셔서 후세인과 역시나 가장 만만한 맥도날드를 갔는데 거기서도 같이 안먹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햄버거를 사서 차로 가지고 가서 같이 먹자고 했는데도 역시나 입에 대지도 않았다. 그냥 나 혼자 먹으면 자기는 나중에 먹겠다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후세인은 신분이 나눠지는 인도의 카스트 제도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것을 확신하게 됐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친해진 후에도 후세인은 식사만큼은 우리와 같이 하지를 않았다. 그때도 나는 후세인에게 사람은 다 똑같고 후세인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편하게 지내자고 아이야기를 해도 후세인은 변하지 않았다. 하기야 50여년을 그렇게 생활했으니...... 하지만 자기 집에 놀러오면 그때는 밥을 같이 먹겠다고 약속했다.
성질 급한 한국인이, 더군다나 매일매일 시간에 쫒기며 마감을 하는 일간지 기자들의 눈으로 보기엔 답답한 모습의 후세인이 우리와 같이 다니면서 정말로 “Korean mind”를 이해한 것일까, 후세인이 완전히 바뀐 모습을 보게 된 일이 있었다.
이라크에서 스커드 미사일을 발사하면 대부분은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요격을 시켰으나 몇 발은 사막에도 떨어지기도 했다. 스커드 미사일이 발사되면 공습경보가 울렸고 우리는 대피소로 피신하다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밤에 잠을 청하려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꽝하는 굉음이 들렸다. 창밖을 내다보니 시내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은 저공비행 미사일이 쇼핑몰에서 명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 차장에게 사실을 알리고 후세인에게 전화를 했다.
미사일이 터졌는데 언제까지 와줄 수 있냐고 물어봤더니 20분정도 걸릴 것이라 했다.
1초라도 빨리 현장에 가야하는 나는 흥분된 목소리로 “No! You have to come here as fast as You can!”이라며 전화를 끊고 장비를 챙겨서 5분 정도 후에 김 차장과 로비로 나갔더니 후세인이 도착해 있었다. 우리는 바로 쇼핑몰 폭파 현장으로 향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대형 샹들리에가 떨어지고 유리창은 깨져있었다. 부상자도 앰뷸런스에 실려 갔다. 상당히 커다란 미사일 파편도 볼 수 있었는데 그 앞에서 사진도 찍었다. 다행히 그 미사일은 생화학 무기가 아니었지만 만일 생화학 무기였다면 어쩌면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은 워낙 긴박한 상황이었기에 후세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마음속으로는 “Korean mind”라 중얼거렸으리라.
어느덧 이라크전은 진행됐고 우리는 미·영 연합군의 보호아래 이라크 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놓은 루마일리아 유전 진화현장, 구호물품을 나눠주는 현장, 수도관 연결현장 등을 취재하며 바그다드에 들어갈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전쟁이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았다. 전쟁 발발 후 2주일 내에 바그다드를 장악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미·영 연합군은 3주가 다 되도록 이라크 남부지역 마저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다. 전쟁이 장기전이 될 것이라 예측한 우리는 철수를 결정했고 그동안 함께 했던 후세인과도 작별준비를 해야 했다. 그 중 하나가 후세인과의 약속대로 후세인 집에 찾아가 밥을 함께 먹는 것이었다. 친척들과 함께 살고 있는 후세인의 집에서 난생 처음으로 인도식으로 손으로 밥을 먹는 경험도 하게 됐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전쟁은 빠르게 끝났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나는 1~2년마다 후세인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후세인은 역시나 “Korean mind”를 되뇌었다. 쿠웨이트에서 들었던 같은 단어였지만 전화통화에서 이야기한 “Korean mind”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아마도 자신을 잊지 않아서 고맙다는 의미였던 것 같다.
3년전쯤부터는 후세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후세인은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 인도로 돌아갔을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올해로 이라크전 발발 10주년을 맞았다.
고위직 취재원도 아니고 잘생기지도 않고 나보다 10살 이상 많은 후세인이 지금도 가끔 그립다. 비록 우리와 햄버거도 같이 먹지 못했지만 우리를 위해주었던 순수한 마음이 그를 보고 싶게 만드는 것 같다.
지금까진 정신없이 역사의 현장을 뛰어다니다 보니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언제 15년차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리되는 한 가지가 있다. 앞으론 후세인처럼 시간이 지나도 생각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취재를 하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한국의 일간지 기자이기 이전에 따뜻한 가슴으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기자이고 싶다.
그래야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기자생활을 정리할 시간이 찾아와도 조금이나마 기쁜 마음으로 정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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