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란성 쌍둥이’ 이집트와 한국의 방송
[글로벌 리포트│중동·아프리카]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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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창현 SBS 카이로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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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2개월 전, 시민혁명의 열풍이 튀니지를 거쳐 이집트에 상륙했다. 거리는 무바라크 30년 독재에 억눌려온 시민들의 함성으로 뒤덮였고, 희생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타흐리르 광장엔 ‘독재타도’를 외치는 혁명의 구호가 넘실댔지만 이곳 방송들은 음모론을 설파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시위를 이끌고 있는 세력이 이스라엘과 미국으로부터 자금지원과 교육을 받고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다”며 모자이크로 얼굴을 가린 내부고발자의 인터뷰가 방송됐고, 처음엔 타흐리르 광장이 평온하다고 거짓 중계방송을 일삼던 기자들은 나중엔 거리의 시민들을 ‘국가전복 세력’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이집트 국영 방송국은 분노한 시민들에게 공격당했다.
최근 아랍 위성방송 알 자지라는 당시 이집트 방송계의 현실을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혁명주도세력을 불순분자로 몰고 시민을 국가전복 세력이라며 공격했던 방송인들의 낯부끄러운 고백이 이어졌다.
시민혁명 주도 세력이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았다던 내부고발자의 인터뷰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한 방송국 관계자를 앉혀놓고 얼굴을 가린 채 주문대로 생산된 ‘조작’이었고 광장이 평온하다는 거짓중계 역시 독재권력과 결탁한 방송국 경영진과 보도책임자들이 지시한 것이었다고 털어놨다. 본연의 책임을 망각한 채 스스로 권력이 되려던 방송인들이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런 이집트 방송계의 현실을 목도하면서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던 한국언론의 지난 몇 년을 떠올리는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유모차를 끌고 촛불시위에 나서 엄마들을 ‘체제전복 세력’으로 몰아가고, 평범한 일상을 강탈당하고 망루에 올랐다 무참히 희생당한 용산의 서민들은 졸지에 ‘도심 테러리스트’가 됐다. 몇몇 보수언론들의 악의적 왜곡이었지만 장악되거나 알아서 머리를 조아린 방송들은 그들의 뒤를 충실히 따랐다.
그리고 그 뒤로도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삶의 터전이 무너졌지만 ‘비판’과 ‘감시’라는 기본이 철저히 유린당한 방송 뉴스는 권력의 ‘궤변’으로 오염됐다.
늦었지만 무기력하고 부끄러운 현실을 타파하려는 방송계 선후배 동료들의 투쟁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그러나 뻔뻔한 MB정권의 앞잡이 노릇을 자임했던 자들에게 이집트 언론인들처럼 반성과 고백을 기대하긴 어려워 보인다. 과거에도 독재정권에 영혼을 판 수많은 언론인들이 있었다. 하지만 단 한번도 그들의 진심어린 사과와 반성을 접해 본 기억이 없을뿐더러 ‘반동’의 시간이 펼쳐지자 그들은 다시 점령군이 돼 역사와 시민을 배신하지 않았는가.
한국의 방송언론계는 앞으로 몇 년간 단호한 ‘과거 청산’ 요구에 직면할 것이다. 역사를 위해서도, 아니 방송언론인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서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그렇지 않다면 SNS로 무장한 시민들이 언제라도 ‘진실’을 배신할 수 있는 ‘우리’를 아예 거들떠보지 않을 미래가 자명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이미 스스로 언론으로 진화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시절이 온다면 시민혁명 때의 이집트 방송국이나, 광주민중항쟁 때처럼 시민들에게 욕먹고 공격당하던 미운 정이라도 남아 있던 과거를 차라리 그리워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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