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최숙현 선수의 명복을 빌며

[이슈 인사이드 | 스포츠] 양지혜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양지혜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양지혜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스포츠 스타에게 어떻게 기량이 늘었느냐 물어보면 “먼지나게 맞으며 배웠다”는 대답이 으레 돌아온다. 남녀 불문, 종목 불문이다. 스포츠 기자를 하면서 1990년대를 휩쓴 연·고대 농구부 오빠들과 2002년 월드컵 태극전사들이 복날 개처럼 두들겨맞으며 컸음을 상세히 알게됐다.


베테랑 여자배구 선수 A는 늘씬한 요정같은 외모와 실력을 겸비했는데 “손찌검은 폭력도 아니다”라고 과거를 웃으며 들려줬다. 열살 때부터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형태의 막대기의 마찰력을 경험했고, 프로 진출을 눈앞에 둔 고등학교 때는 ‘리시브 1개 놓치면 귀싸대기 1대’ 식으로 훈련했다고 전했다. “진짜 살벌하게 맞았어요. 배구 코치가 손 힘이 얼마나 세겠어요. 손바닥 크기는 말할 것도 없고. 귀싸대기만 하루 수 십번씩 ‘풀 스윙’으로 맞아서 얼굴이 멍게처럼 시뻘겋게 붓고 고막이 터질 것 같았는데 울지도 않았어요. 다 그렇게 운동하는 줄 알고 참은거죠. 그래서인지 기본기는 아직도 자신있어요. 요즘 후배들은 덜 맞고 배워서 그런가 기본기가 우리만 못해요.”


예전엔 얼마나 때렸길래 요즘 후배들은 덜 맞는다는 말이 나오는걸까. 한국 정부가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할 때 태어난, 한국 야구의 미래로 불리는 투수도 올 초 인터뷰에서 ‘엉덩이 찜질’로 강속구를 단련했다고 털어놨다. “초등학교 야구부 감독님이 처음엔 야구를 친절하게 가르쳐주셨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야구 입문 1년만에 선수 길을 걷기로 마음을 굳혔는데, 그때부터 감독님 눈빛과 말투가 싹 바뀌더라고요. 저는 이제 야구 아니면 오갈데없는 ‘잡힌 물고기’가 된 거니까요. 야구 방망이 풀 스윙으로 엉덩이나 허벅지를 수십차례 맞으면 사람 피부 색깔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시죠? 저희 세대도 감독님이나 선배들한테 지겹게 맞았어요.”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고(故) 최숙현 선수는 한국 스포츠의 악몽 같은 현실을 죽음으로 고발했다. 최 선수가 훈련했던 트라이애슬론은 인간 한계를 뛰어넘는 체력과 인내력을 요구해 ‘철인 3종 경기’로 불리는 종목이다. 올림픽 메달 기준으로는 수영 1.5km를 20분만에, 사이클 40km를 50분만에 끝내고 달리기 10km를 30여분만에 마쳐야한다. 철인을 꿈꾸던 최 선수는 달리고 수영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자신과의 싸움은 이겨냈지만, 짐승처럼 때리고 욕하는 타인과의 싸움 앞에서 절망했다.


최 선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하루 전까지 경찰과 대한체육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 여러 차례 피해 사실을 알리며 도움을 호소했다. 정작 언론사 제보는 안했다. 왜 안했을까. 관심 못받는 비인기 종목, 그 종목 안에선 제왕으로 군림하는 국내 1인자의 만행을 언론은 당연히 외면하리라 생각한 것일까. 운동 선수는 일단 성적으로 말한다고, 한국 엘리트 체육은 원래 맞으면서 큰다고, 어쩌면 맞을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체육계의 악습에 익숙해져버린 기자의 내면을 최 선수가 읽어버린 것같아 죄책감이 스민다.


최 선수를 괴롭힌 타인들은 6일 국회에 나와 “때린 적 없다”는 거짓 변명을 늘어놨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최 선수와 동료들의 피해를 밝혀 가해자를 처벌하고,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도록 기사로 한국 체육계를 꾸준히 감시하는 것이 기자로서 고인의 뜻을 받드는 길이 될 테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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