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규제'와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글로벌 리포트 | 일본]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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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황현택 KBS 도쿄특파원.

특파원 부임 첫날이던 작년 7월1일. 오전 10시에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가 발표됐다. 불매 운동과 지소미아 등 ‘수출 규제’ 국면은 연말까지 이어졌다. 해가 바뀌고 중국에서 코로나19가 확산했다. “숨 좀 돌리나” 싶은 얄팍한 생각이 들었다. 와중에 일본 요코하마항에 배 한 척이 들어왔다. 대형 크루즈선 ‘다이아몬드 프린세스’였다.


두 얘기를 꺼낸 건 일본 언론 때문이다. 먼저 수출 규제. 작년 7월23일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상은 트위터에 이런 글을 썼다. “NHK에 ‘수출 규제’ 말고 ‘수출 관리’라고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보도로 쓰일까?” 외압으로 비칠만한 글을 일부러 노출한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이 다음 날 생겼다. NHK 낮 뉴스부터 ‘수출 규제’란 표현이 실제 ‘관리’로 바뀌었다. 그의 궁금증이 하루 반나절 만에 해소된 셈이었다.


탄력받은 세코 장관은 이후 언론사 기사 제목을 매일 정리해 트위터에 올렸다. ‘규제’를 고집하면 네 편, ‘관리’로 바꾸면 내 편이란 인식을 심었다. 스파링 상대 대하듯 며칠 두들기자 공영방송 NHK에 이어 가장 많은 신문을 찍어내는 요미우리가 이탈했다. 검색해 보니 아사히와 마이니치, 도쿄, 니혼게이자이 등은 지금도 ‘규제’란 표현을 버리지 않았다. 쓰는 말에 따라 극우·보수, 중도·진보로 매체 성향이 갈리는 게 흥미로웠다.


이번엔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지난 6일, 일본 정부는 세계보건기구(WHO)에 요구해 배에서 나온 확진자를 전체 감염자 수에서 빼는 데 성공했다.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기타 항목’이 생겨났다. 그런데 같은 날, WHO 사무총장은 의미심장한 트윗을 날렸다. “일본이 ‘후하게’ 1000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적었다. 매수인지, 압력인지, 아무튼 ‘쩐주’(錢主·전주)가 밑천을 댄 시점이 절묘했다. 크루즈선 확진자는 691명(사망자 3명 포함·23일 현재), 일본 전체 확진자 중 82%를 떼어냈다.


탄력받은 아베 내각의 타깃은 또 언론이었다.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은 WHO 결정 후 “보도 각사는 WHO 방침에 근거해 보다 적절하게 사실관계를 전하라”고 말했다. 한 마디로 “배의 국적(선적)은 영국이고, 배에 타려면 출국 수속도 필요하니 선내는 일본이 아니”라는 논리였다. ‘글로벌 스탠다드’란 명분도 있었다. “곧 바뀌겠구나!” 싶었던 건 ‘수출 관리’가 준 기시감 탓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일본 언론들은 꿈쩍하지 않았다. 크루즈선을 합한 확진자 수를 계속 전했다. 이탈사(社) 없이 대오도 굳건하다. 말이 안 통한다고 봤는지 일본 정부의 ‘뺄셈 요구’가 심해졌다. “일본에 잠깐 들른 배다”, “일본에 오기 전 감염된 사람들이다”, “숫자가 부풀면 올림픽 망한다”, “이걸 포함하면 어느 나라가 배를 받아주겠나.” 때론 협박, 때론 하소연처럼 들렸다.


일본 기자에게 “왜 이번엔 다르냐”고 물었다. 그는 “복잡한 국제법 따질 게 아니다. 일본인이 3분의 1(3711명 중 1341명) 넘게 타고 있는데 그걸로 끝난 거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 정부는 전세기로 중국에서 데려온 일본인 확진자를 ‘국내 통계분’에 포함하고 있다. 일본에 오기 전에 감염된 사람이 상당수로 보이는데도 말이다. KBS 일본지국의 현지인 직원은 ‘기지노카쿠레’(雉の隱れ)라는 말을 알려줬다. ‘풀숲에 머리만 숨긴 꿩’처럼 결점 일부를 감춰봤자 소용없다는 뜻이란다.


권력에 있어 언론은 전략적 소통의 핵심 창구이다. ‘수출 규제’는 누가 봐도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였다. 그런데 ‘관리’라는 표현이 자주 쓰일수록 일본 내 ‘보복 프레임’은 묻혔다. 반대로 언론이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아무리 거창한 정책과 해명도 ‘말 잔치’로만 끝나기 십상이다. 아베 정부의 ‘다이아몬드 프린세스’ 대응은 ‘영해 포기 선언’이란 비아냥까지 듣는다. 서로 견제하고, 서로 개입하는 권력의 말과 언론의 말. ‘배배 꼬인’ 이 관계에서 고르는 말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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