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서 본 故김영희 대기자, 그의 삶은 '취재'였다

[한국 외교안보 62년 역사 잠들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반도 걱정'
예순 넘어도 군부대 직접 취재

후배들이 갖춰야할 덕목으로
끊임없이 현장과 전문성 강조

지난 18일 토요일 오전 10시30분쯤. 62년간 ‘현재 진행형’이던 한국 외교안보의 역사는 한 줌의 아이보리빛 재로 멈춰섰다.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 추모공원 7번 화로에서 화장(8시53분~10시13분)과 냉각을 마친 뒤 유골함에 담겨 유족에게 건네진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의 이야기다.


시간을 먼저 언급한 건 필자에겐 특별한 시간이어서다. 고인이 2017년 12월 말 비상임 저널리스트 겸 명예 대기자로 사실상 은퇴의 길에 선 뒤 필자는 한 달에 두어 차례 김 대기자와 만났다. 외교안보 현안을 놓고 토론하고, 정리하는 자리였다. 주로 토요일 오전 11시가 약속시간이었으니, 그날 그 시간은 김 대기자와의 약속을 위해 집을 나서야 하는 때였다. 그런데 빨간색 사인펜을 들고 밑줄을 긋거나, 깨알 같은 메모를 하다 “왔는가”라며 맞아주던 모습은 흰색 종이 위의 가루로 변해 있었다.  


김 대기자는 2003년 췌장암 판정을 받고 17년간 투병했다. 당뇨와 고혈압도 앓았다. 지난해 11월 말 그는 “약이 말을 듣지 않는다. 병원을 바꿔 보려한다”고 했다. 12월 초 “다른 병원에 가서 약을 바꿨더니 다시 잡힌다”고 했지만 1월 들어 전화 통화가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떨어졌다. 유족이 전한 김 대기자의 마지막은 이렇다. 자택에서 신문과 TV를 보며 한·미 관계를 챙기고,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건강 관리를 위해 식사량을 대거 줄였지만 당일은 평소의 1.5배 가량 ‘든든히’ 챙겨 드셨다고 한다. 과일 몇 조각과 즐겨 찾던 키위 주스나 망고 주스 대신 토마토 주스 반 컵을 곁들였다. 그러곤 오침을 하겠다며 침실로 향했고, 그것이 마지막 걸음이었다. 40분쯤 뒤 부인이 침실로 들어가 “저녁식사를 뭘로 하면 좋겠냐”, “트럼프(대통령) 소식이 궁금하지 않냐. 왜 이리 오래 주무시냐”고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직 손에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심장은 멎었고 김 대기자는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린 채 웃는 모습으로 떠났다. 15일 오후 4시10분이었다.


지난 15일 생을 마감한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 2016년 5월 평화학의 창시자인 요한 갈퉁 박사를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오른쪽 사진 위). 1997년 2월 미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함에 탑승해 취재하고 있는 모습. /중앙일보 제공

▲지난 15일 생을 마감한 김영희 중앙일보 대기자. 2016년 5월 평화학의 창시자인 요한 갈퉁 박사를 만나 인터뷰하고 있는 모습(오른쪽 사진 위). 1997년 2월 미 항공모함 인디펜던스함에 탑승해 취재하고 있는 모습. /중앙일보 제공


영원히 꼿꼿할 것 같았던 김 대기자의 체력은 2018년 여름부터 급격히 떨어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중 넘어져 고관절이 골절됐고, 병원에 한 달여 입원한 게 컸던 것 같다. “올해 여름이 너무 더워 여기(병원)로 피서왔다”며 웃었지만, 입원 기간 근육이 줄어 퇴원 후 다섯 차례 낙상 사고를 겪으며 악순환이 되풀이됐다. 약속장소도 자택에서 1㎞가량 떨어진 청담 M햄버거 전문점에서 압구정동 K자동차 국내사업본부 1층 커피숍으로 옮겼다. 이동거리를 줄인 것이다. 약속에 늦지 않으려 10분, 30분을 일찍 갔지만 언제나 김 대기자가 먼저였다. 후에 알았지만 이 커피숍은 김 대기자의 기자실이었다. 카페라테에 샌드위치 하나를 놓고 점심을 해결하며 새로 구입한 흰색 노트북 앞에서 신문을 스크랩하고, 책을 읽고 정리하는 ‘기자 버릇’은 지난해 말까지 이어졌다.


김 대기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한반도 걱정을 놓지 않았다. 외교와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안보 현안까지 챙겼다. 한국에 없는 책은 지인들을 통해 공수했고, 전쟁 이론서와 3차 세계대전이나 잠수함전을 다룬 전쟁 소설을 섭렵했다. 전직 장성들도 숱하게 만나고 다녔다. 이를 토대로 한반도의 운명, 특히 핵문제와 관련한 서적을 집필하려 했다.


간혹 본인의 기자생활을 추억할 때면 후배 기자들이 갖춰야 할 덕목과 화두를 던졌다. 현장과 전문성이 그것이다. “기자는 현장에 있어야 하고, 현장을 확인해야 한다. 몇 번이고 확인에 확인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칼럼을 쓰면 몇 십 년 후배인 담당 기자에게 이메일을 보내 잘못된 팩트를 찾아 달라는 지시에는 대기자의 권위보다 사실을 추구하려는 열정이 녹아 있었다. 예순을 넘기고도 잠수함이나 F-15전투기를 직접 봐야겠다며 장거리를 이동해 군부대를 찾은 건 ‘현장 기자 김영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대기자는 2012년 소설 ‘하멜’을 출간했는데 조선시대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에 등장하는 곳을 자비를 들여 일일이 찾아 현장 검증을 하고서야 집필했다. 또 “많은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되, 때론 취재원들에게 ‘에헴’하며 건방지게 한 수 가르쳐 줄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는 조언도 남겼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암살(1963년 11월23일) 특종 보도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6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2001년) 전 소련 대통령의 인터뷰가 어느 날 뒷걸음치다 걸린 ‘한 방’이 아니라 성실과 꾸준함으로 쌓은 공든 탑이었던 셈이다.


정용수 중앙일보 국제외교안보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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