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직장 내 성범죄' 잇따라… 징계해도 후속 조치때 또 갈등

KBS·CJB 등 부당징계 판정… 한겨레, 가해자 복귀 앞두고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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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이 직장 내 성범죄로 징계를 받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가해자에 대한 징계를 통해 사건은 일단락된 듯 보이지만, 징계 이후 발생하는 문제들로 인해 언론사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가해자가 억울하다며 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에 구제 절차를 밟아 부당 징계 판정을 받거나, 후속 조치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가해자가 회사로 복귀하는 문제 등을 두고 내부적으로 진통을 겪고 있다.


KBS와 CJB청주방송은 지노위의 부당 징계 판정으로 인해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KBS는 사내 성추행·성희롱을 일삼은 지역 총국 기자에게 지난해 12월 정직 6개월 처분을 내렸지만, 서울지노위가 지난 5월 “징계 사유는 인정되나 객관적 입증이 부족하며, 징계 사유에 비해 징계양정이 과도하다”고 판정해 논란이 됐다.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지난 8일 서울 영등포구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 이들은 KBS가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사건 가해자에게 내린 정직 6개월의 징계를 서울지노위가 징계 사유에 비해 양정이 과도하다는 취지의 판정을 내린 것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 발생 맥락을 무시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원들이 지난 8일 서울 영등포구 서울지방노동위원회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규탄 발언을 하고 있다. 이들은 KBS가 직장 내 성희롱·성추행 사건 가해자에게 내린 정직 6개월의 징계를 서울지노위가 징계 사유에 비해 양정이 과도하다는 취지의 판정을 내린 것에 대해 “직장 내 성희롱 발생 맥락을 무시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지난 8일 서울지노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직장 내 성희롱 발생 맥락을 무시한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KBS도 “지난해 성평등센터를 설립하고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 대하여 무관용의 원칙으로 엄중히 대응하고 있다”며 “지노위 결정은 성희롱 사건의 특수성과 해당 사건의 사실관계가 충분히 고려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해 불복 절차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KBS의 짧은 징계 시효가 걸림돌이 됐다는 지적도 있다. 여성단체연합은 “피해자들은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피해를 입은 것으로 드러났지만 KBS 인사규정에 직장 내 성희롱 징계 시효가 2년으로 짧아 2014년부터 발생한 성희롱 사건은 인정되지 못했다”며 “KBS는 성희롱 사건의 징계 시효를 재검토하고 실효성 있는 징계시효를 도입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KBS는 “지난 4월24일 자로 성평등기본규정에 징계 시효 기한을 늘렸다”며 “KBS 직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의 동의를 얻은 때부터 효력이 발생한다고 규정하고 있어 과반 노조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CJB청주방송은 지난 1월 직원들에게 성희롱과 갑질을 일삼은 PD를 해고했지만, 충북지노위는 지난 4일 부당해고로 판정하며 복직 명령을 내렸다. 청주방송 피해자 단체와 노조는 사측 대응에 문제가 있어 부당해고 판정이 나왔다고 비판하고 있다.


청주방송 피해자 대표는 “청주방송 구성원이 함께 싸워 해고 징계가 이뤄졌지만, 부당해고 지노위 판결 때 사측이 노조위원장이나 진상조사위에 참여한 변호사를 참고인으로 동석시키지 않는 등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청주방송 측은 지노위 판정 이후 대응 계획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지난 10일 여성 직원들에게 보낸 문자메시지에서 “회사 차원의 향후 대응방안은 여러 각도로 고민 중”이라고 알린 것으로 나타났다.


징계 기간 중 관리와 복귀 후 발령 문제 등 후속 조치에서도 내부 구성원들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라는 원칙을 현실에 적용하는 문제 때문이다. 한겨레신문은 지난 5월 사내 성추행으로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가해 기자의 복귀를 앞둔 상황에서 인사위원회와 젠더데스크가 함께 대책을 준비하고 있다. 임지선 한겨레 젠더데스크는 “사건 발생 시점부터 징계가 이뤄지는 동안과 복귀 이후의 가해자 관리는 어떻게 할지 계속 논의해왔다”며 “징계 기간 중 가해자는 의무적으로 재발 방지를 위한 15시간 교육을 전문상담센터에서 받아야 했고 진심으로 자숙하고 있는지 검토받기 위해 젠더데스크와 수시로 만나야 했다. 피해자들의 의견 청취도 계속 하고 있다. 조직의 첫 사례이기 때문에 선례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KBS는 사건 접수 후 신속하게 가해자를 다른 곳으로 배치했지만, 해당 부서의 불만으로 또 다른 내부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KBS 2노조인 KBS노동조합은 지난 8일 지노위 판정 이후 성명을 통해 “사측은 피해자와 격리시킨다며 가해 직원을 인재개발원으로 무작정 대기 발령시켜 이곳이 직원들의 대기발령소냐며 인재개발원 직원들의 큰 반발을 샀다”고 비판했다.


청주방송 피해자들은 가해자 복직을 앞두고 사측의 안일한 후속 조치로 이미 2차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청주방송 피해자 대표는 “회사 차원의 대응 움직임이 보이지 않아 피해 직원들이 불안해 하고 심리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며 “피해자 단체, 노조, 충북 여성단체와 공동대응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권박미숙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장은 “미투 운동 이전에는 사건이 발생하면 피해자를 조직에서 배제하는 방식이었다면 이제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단계까지는 왔다. 하지만 문제를 일으킨 사람만 없애면 끝이라는 인식은 여전하다”며 “직장 내 성범죄는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성범죄를 저지를 수 있게끔 용인한 조직 문화에서 비롯된다. 그만큼 조직이 책임을 갖고 징계 과정부터 가해자 복귀 이후까지의 토론이 필요하다. 고민 없이 징계만 하고 후속 조치를 관리하지 않으면 아무런 개선 없이 가해자가 징계 이후 회사로 복귀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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