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져라, 민감해져라

[언론 다시보기] 구정은 경향신문 선임기자

구정은 경향신문 선임기자.

▲구정은 경향신문 선임기자.

‘미투’가 뜨거운 이슈였던 지난해, 기획시리즈의 하나로 ‘남성의 탄생’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만들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한국 남성들이 여성을 ‘물건 취급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담은 글이었다. 그 뒤 1년, 더 나아진 사회에 대한 희망적인 소식 대신 버닝썬과 연예인들의 불법촬영이 사회를 달군다. 버닝썬 클럽 사건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술집에 들어갔다는 이유로 그런 일을 당한다니. 하지만 이 뉴스의 ‘밸류’를 평가하는 데에서 확실히 여성과 남성의 체감도는 다른 것 같다.


언론은 어떤 논란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매체는 일련의 사건을 놓고 피해자들을 찾아낸다며 2차 가해를 하고, 또 어떤 쪽에서는 성범죄 보도의 원칙을 가다듬는다. 소셜미디어에는 사건의 흐름 못잖게 보도 행태를 주시하는 이들의 글이 올라온다. 방송에서 연예인들이 과거 보여준 모습들을 되짚으며 ‘당시엔 무감각했던’ 우리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불법촬영물이 여성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기 전까지 ‘몰카’라는 말의 위험성을 몰랐고, 물뽕이니 돼지발정제니 하는 것들이 그렇게나 유통되고 있다는 걸 몰랐다. 여전히 온라인 기사에는 ‘성접대’라는 단어들이 버젓이 제목으로 뽑혀 있다.


나부터 둔감했다. 프로 불편러가 돼야 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젠더감수성을 키워야 한다는 것을 이 험악한 뉴스들 사이에서 새삼 배운다. 누군가 불편함을 호소하면 늘 누군가는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고 말한다. 민감함의 적정선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민감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또한 ‘권력’임은 분명하다. 어떤 문제를 예민하게 느끼지 않는다면 그건 ‘예민하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 기업체 간부는 성차별·성희롱을 얘기하다가 “여기자들은 그래도 덜 당하지 않느냐”고 내게 물었다. 그럴까? ‘남성을 접하는 모든 여성’은 차별이나 공격을 당한다. 나와 마찬가지로 여성인 그 기업 간부가 여기자들의 현실을 몰라서 물었을 것 같지는 않다. 기자들을 포함한 이 사회의 남성들을 만나면서 그가 겪어온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민감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기자는 구색 맞추듯 한 해 한두 명만 뽑던 시절에 언론사에 들어와 지금까지 버텨왔던 시간들을 함께 떠올린다.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기 힘들어 결국 퇴사한 후배 기자에게 뭐라고 말을 해줬어야 옳았을까 부질없는 고민을 해본다. 내 딸이 살아가야 할 ‘버닝썬 사회’의 암담함에 생각이 미치면 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신경을 짓누른다.


퇴근길 지하철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몰래카메라는 범죄입니다”라고 알리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는 경각심을 일깨우기엔 너무나 경쾌하다. 한없이 불편해지고 민감해지는 것 외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이 또 뭐가 있을까. 더군다나 언론이라면, 기자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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