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항서 열풍의 이면

[글로벌 리포트 | 베트남]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정민승 한국일보 호찌민특파원.

베트남이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북미 담판장으로 낙점되면서 한국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지난해 베트남을 열광케 했던 ‘박항서 열풍’이 음악과 드라마·영화, 음식, 화장품 등 대중문화, 소비재 중심의 한류를 스포츠 분야로 확대시켜 관련 분야 교류를 늘린 데 이어 이번 2차 북미정상회담의 베트남 개최로 한베 관계는 외교 안보 분야서도 더욱 긴밀해지는 모양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최근 베트남은 개발 도상의 주변국들로부터 많은 부러움을 받고 있다. 1억에 육박하는 인구를 이끌고 지난해 7% 경제성장을 이뤘다. 10년 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이다. 작년 말부터 자국 기업이 자체 스마트폰을 생산하기 시작한 데 이어 올해에는 고유 브랜드의 자동차 출시도 예고돼 있다. 정부 지원을 업고 있는 ‘베트남의 삼성’, 빈그룹 작품들이다. 해외의 기술과 부품을 가져와 단순 조립하는 상품이라고는 하지만, 동남아에서 스마트폰을 자체 생산하는 나라는 베트남이 유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베트남 국민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갈만하다. 또 자동차의 경우 말레이시아가 자국에서 자체 자동차를 생산해도 수출은 되지 않는, 품질 낮은 내수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자국 고유의 자동차 생산으로 베트남 입지는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무엇보다 베트남이 기세등등 한 이유는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의 성적이다. 작년 1월 아시아축구연맹(AFC) 23세 이하 대회 준우승을 시작으로 12월 아세안축구연맹(AFF) 우승을 일구며 베트남 축구사를 새로 썼다. 또 지난달에 열린 아시안컵(AFC)에서는 동남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8강까지 올라 ‘아세안의 호랑이’로 완벽하게 자리매김했다.


베트남 국민들은 열광했고,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승리의 기쁨을 안겨 준 한국인 박 감독에 환호했다. 베트남을 찾은 많은 한국인들은 베트남에서 환대 받았고, 한국인들은 베트남 국가대표팀 생중계를 2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화답했다. 이쯤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한국과 베트남 현대사의 아픈 상처가 스포츠를 통해 극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작은 기대도 가슴 한 구석에 품기도 했다. 국빈 방문한 대통령 등 어느 정치인도 외교관도 기업인도 수교 사반세기 동안 하지 못한 일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실제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베트남 국민들의 호감도는 크게 향상됐다는 사실이 설문조사를 통해 확인됐다. 박 감독이 유명세를 타기 직전이던 2017년 12월과 올해 1월에 각각 베트남 성인 남녀 1000명을 상대로 한 한국일보 설문조사 결과다.


두 번째 설문조사에서 ‘박 감독 때문에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다’는 질문에 73.8%가 ‘그렇다’는 취지로 응답했는데, 이는 2017년 12월 1차 조사 당시 ‘한국 문화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비율(61%)보다 크게 높아진 것이다. 특히 베트남 사회를 주도하는 40대의 인식이 48%에서 71%로 급상승한 점이 눈에 띈다. 드라마와 음악 중심의 한류 문화가 젊은층과 여성들 사이서는 높은 인기를 끌긴 끌었지만, ‘박항서 매직’은 바로 구매력 높고 여론을 주도하는 베트남 국민들에게까지 작동했다.


문제는 베트남 국민들이 박 감독에 고마워하고, 한국인 관광객을 만나면 반기면서도 속은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 사실이 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영향을 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렇다’고 답한 사람은 263명(26.3%)을 기록했다. 1차 조사 당시 300명(30.0%)에서 3.7%포인트 감소하긴 했지만 1년 사이 상승한 호감도에 비하면 그 폭은 인색한 수준이다. 특히 50대 이상 노년층(전체 응답자 150명)에서는 그 응답자가 31명에서 48명으로 오히려 55% 증가했다. 이 같은 베트남 국민들의 깊은 정서를 반영하듯, 지난해 3월 국빈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에게 당시 쩐 다이 꽝 주석은 문 대통령의 ‘불행한 역사’ 유감 발언에 대해 “한국 정부의 진심을 높이 평가한다”면서도 “과거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더’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베트남을 찾은 한국인은 전년 대비 44% 늘어난 348만명에 이른다. 교민, 주재원의 출입국까지 포함된 수치다. 이들 중 이 같은 분위기를 알고 있는 한국인이 적지 않지만,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의 한국인들은 ‘박항서 열풍’에 가려진 이 같은 사실을 모른 채 베트남을 찾는다. 박항서는 박항서, 과거사는 과거사. ‘박항서 열풍’의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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