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지역국 촬영기자가 받는 '이상한' 대기명령

명령은 없지만 임의로 조 편성
월 5~6회, 많게는 수십 번씩 위수지역서 '돌발 대비' 대기
인력 적은 을지국선 격일 대기... 안 했다고 시말서 쓰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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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불려나갈지 모르니 계속 조바심이 납니다. 대기명령이 있는 날엔 잠도 안 올 정도예요. 전화벨 소리에 깰까 가족들과 다른 방에서 자는 경우도 있습니다.” KBS 지역 총국에서 일하는 A 촬영기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대기명령 날마다 잠을 못 이룬다고 말했다. 언제 전화벨이 울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는 “30년을 촬영기자로 일하고 퇴직한 선배가 아직도 대기명령이 있던 날엔 잠을 잘 못 잔다고 하더라”며 “일종의 정신적 스트레스”라고 토로했다.


KBS 지역국 촬영기자들이 달마다 대여섯 번에서 많게는 수십 번씩 돌아오는 대기명령에 고통 받고 있다. 대기명령은 야간에 사건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출동하라고 전화할 수 있으니 위수지역에서 대기하라는 명령이다. 대기근무와 같은 개념인데 다만 KBS의 경우 누구도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대기명령과는 다르다. 촬영기자들끼리 임의적으로 조를 짜 야간 대기를 하기 때문이다.


지역 총국에서 일하는 B 촬영기자는 “서울의 경우 촬영기자들이 당직을 서면 다음날 오전에 퇴근하는데 지역에선 가장 인원이 많은 총국도 7명 수준이라 당직으로 누군가 빠지면 제작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인원만 남게 된다”며 “이 때문에 촬영기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순번을 정해 대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대기를 안 하면 위에서 시말서 등 책임을 묻기도 해 안 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지역국 인원에 따라 대기명령 횟수가 무제한으로 늘어난다는 점이다. 총국이든 을지국이든 속해 있는 촬영기자 인원에 따라 돌아가며 야간 대기를 하는데, 두 명 정도가 일하는 을지국에선 거의 격일로 대기 근무를 해야 한다. 을지국에서 일하는 C 촬영기자는 “평일의 경우 한 사람은 이틀, 한 사람은 3일을 대기명령을 받는다”며 “한 달 전에 근무표가 짜여 나오는데 다른 기자들과 바꿀 수가 없으면 관혼상제 같은 중요한 약속이라도 어쩔 수 없이 위수지역에서 대기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집이 총국 지역에 있는 을지국 촬영기자들은 위수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주에 두세 번은 회사 내 휴게실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 KBS에서 제공하는 사택이 직원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C 기자는 “취재기자까지 합하면 10명이 조금 안 되는데 회사에서 제공하는 사택은 두 채다. 나는 사비로 집을 구하는 것이 아까워 야간 대기 때 휴게실에서 잔다”며 “편히 쉴 수라도 있게 회사에서 장소를 제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점도 기자들에겐 불만이다. 총국에서 일하는 D 촬영기자는 “야간에 일이 안 터지면 수당이 없는 거고, 일이 있어야 돈을 받는 구조다. 가령 새벽 3시에 불려가 5시까지 일했다면 두 시간 일했다고 시간 외 수당을 올리는 것인데 충분한 보상인 것 같지는 않다”며 “예전에는 지역국 촬영기자도 야간 당직 근무를 했고 그러다 지금의 대기명령으로 변질됐다고 들었다. 사측이 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려 꼼수를 부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게다가 내년 7월부터 적용될 노동시간 단축을 고려해보면 대기명령은 부당노동행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6월 고용노동부가 낸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대기시간은 사용자로부터 지시를 받지 않을 것을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에 근로시간으로 봐야 한다. KBS원주에서도 대기명령을 불법으로 보고 올해부터 촬영기자들이 야간 대기를 하지 않고 있지만 이런 곳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 지역협의회는 지난 15일 성명을 내고 “지역국 촬영기자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며 “당장 사측은 지역국 촬영기자에게 야간 당직 근무를 시키든, 최소한의 당직 수당을 지급하라. 그렇지 않다면 집단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대구 총국 촬영기자인 백창민 KBS전국기자협회 부회장은 “10년도 더 넘게 이 문제를 개선하라고 사측에 반복적으로 얘기해왔다. 문제 개선을 위해 당시 TF도 만들었고 성명도 냈지만 그때마다 실패했다”며 “두 달 전에 사측과 회의를 하고 이 문제를 논의했으나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측 간부들은 부당노동행위로 볼 여지가 있다며 인정해 놓고는 지금까지 무소식이다. 사측이 하루 빨리 기형적인 야간 대기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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